오피니언 사내칼럼

시베리아 ‘出兵’…왜곡의 달인들



1918년 4월 5일, 일본 해군 육전대 100여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이닥쳤다. 명분은 거류민단 보호. 공산 혁명의 혼란 속에서 일본인 상점의 점원 1명이 살해 당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상륙작전을 펼쳤다. 외항에서 대기 중이던 영국 해군 순양함도 동조해 무장병력 50여명을 상륙시켰다.* 1차대전과 러시아혁명의 와중에 일본과 미국ㆍ영국ㆍ프랑스 군대의 간섭(intervention)이 연해주에서도 시작된 순간이다.**

왜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냈을까.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다. 연합국의 일원이던 제정 러시아에 제공한 총포 등 전략물자가 독일로 유출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백군을 도와줄 경우 공산혁명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 앞섰다. 여기에 체코군단을 구출해야 한다는 명분까지 생겼다.


체코군단이란 오스트리아군에 징집돼 러시아군에 잡힌 체코 출신 포로를 독일·오스트리아와 싸울 군대로 재편성한 외인부대.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고 연합국 대열에서 이탈한 레닌에게 체코군단은 뜨거운 감자였다. 독일과 계속 싸우겠다며 항전 의지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체코군단을 러시아에서 빼내 프랑스 전선에 투입하자는 연합국의 종용에 대한 레닌은 우회 귀국길을 택했는데 여기서 사달이 났다.

서유럽의 국경을 바로 넘기가 여의치 않다는 핑계를 대고 시베리아 철도를 돌아 선박으로 유럽 전선에 보내는 길고도 긴 여정. 1918년 5월 우발적 사건으로 붉은 군대가 체코 병사들을 구금하자 무장를 갖추고 있던 군단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 러시아 한복판에서 운송수단을 탈취하고 붉은 군대를 피해 필사적으로 탈출하겠다는 체코군단의 봉기는 그렇지 않아도 간섭의 명분을 찾고 있던 열강에는 좋은 구실이었다.***

체코 군단은 천신만고 끝에 안전하게 빠져나가 고국으로 돌아갔다. 모두 9만여명에 이르렀던 국제 간섭군도 이때부터 명분을 잃었다. 연해주지역에서는 일부 중국 군벌까지 국제 간섭군에 합류했으나 공산 러시아 군대는 갈수록 강해졌다. 버티다 못한 국제 간섭군은 체코군단이 철수한 1920년 군대를 빼냈으나 일본은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키며 버텼다. 왜 눌러 앉으려고 했을까.

끝없는 확장 야욕 탓이다. 일본은 시베리아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일본 육군의 21개 사단 가운데 11개 사단이 직간접적으로 참전해 무려 7만5,000여명의 일본군이 이 지역을 휘저었다. 소련이 세운 괴뢰 극동공화국을 일본의 영향권으로 삼으려는 획책도 시도했다. 성공했을까. 실패로 끝났다. 붉은 군대의 저항과 20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고비마다 일본군과 백군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

결국 일본은 아래 연간 세출(1918년 10억 1,700만엔)에 버금하는 전비를 소진하고 5,000여명의 전사자를 낸 뒤에야 소련과 수교(1925년)를 맺고 군대를 완전히 빼냈다. 여기서 의문이 나온다. 왜 출병(出兵)인가. 근대 일본이 지출한 역대 전쟁비용 중에서 가장 많고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전투를 펼쳤는데 왜 전쟁이 아니고 출병일까. 두 가지 의도가 엿보인다.


무엇보다 다른 국가들이 체코군단 구출이라는 인류애적 명분 아래 내건 ‘간섭’이라는 미명에 포함될 수 있다고 믿었으리라. 실패한 침략의 역사가 지니는 의미를 희석시키려는 의도 역시 ‘출병’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로 해석된다. 침략을 ‘진출’로 포장하는 ‘왜곡의 달인들’답다. 일본군 전사자 5,000여명은 곱게 죽었을까. 출병으로 살해 당한 시베리아의 조선인과 러시아인들은 원한이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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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자 일본이 감추고 싶은 역사가 남긴 부작용은 우리 민족에게 고스란히 넘겨졌다. 조선이 쌀 수탈기지로 변한 시기가 시베리아 전쟁에 앞둔 일본의 곡가 폭등과 대규모 소요사태 직후다. 전쟁을 앞두고 수요가 늘어날 쌀에 대한 매점매석이 쌀 소동(1918년 7월)으로 번지며 결국 조선의 곡창지대는 일본인을 위한 쌀 공급기지로 바뀌었다. 일제는 쌀 부족 타개를 위해 조선에서 산미 증식에 적극 나서 쌀 생산이 배증했지만 조선인 1인당 미곡 섭취량은 오히려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증산분 이상의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간 까닭이다.

일본군대가 여성을 성 노리개로 삼은 위안부제도 역시 이때부터 시작됐다. 민족 이민사의 최대 비극인 연해주 조선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1937년)도 일본이 시베리아 출병과 무관하지 않다. *****

일본의 출병이 아닌 침략 전쟁이 시작된지 만 98년. 침략의 시제는 과거형일까. 감추고 왜곡하는 일본인에게 놀아나던 못난 조상들과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일본군의 공식 파병 일자는 1918년 8월 12일로 육군 500명이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했다. 공식 참전 4개월 이전에 현지 함대 사령관의 결정으로 병력이 상륙했다는 점은 일본 군부가 어떻게든 러시아 적백내전에 끼어들고 싶었다는 반증이다.

** 연합국의 러시아 내전 간섭(Allied intervention in the Russian Civil War)은 시베리아 뿐 아니라 러시아 곳곳에서 벌어졌다. 크림반도에는 그리스군 2만 4,000명과 폴란드군 1만 2,000명이 깔렸다. 미군 1만 3,000명, 캐나다군 4,000명, 세르비아군 4,000명, 이탈리아군 2,000명, 영국군 1,600명, 프랑스군 760명이 백해 부근의 항구 아르한겔스크과 블라디보스톡에 각각 진주했다. 루마니아군 4,000명은 아르한겔스크에만 파견되고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톡에만 병력을 보냈다.

*** 체코 군단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수천량의 열차와 러시아 황제가 감춰뒀던 금괴며 무기를 탈취한 그들은 시베리아 철도노선에서 은행과 우체국·신문사까지 운영하며 2년간 동진을 계속해 4만 7,000여명이 블라디보스톡에 안착, 고국행 배에 올랐다. 시베리아를 떠나기 전, 이들이 헐값에 넘긴 소총과 기관총, 탄약으로 무장한 독립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적군을 도왔던 시베리아 조선인 독립군들의 활약은 독립운동사에서 재조명받아야 할 부분이다. 조선인 독립군 부대의 활약상은 구소련이 감췄던 미공개 외교문서와 각종 사료를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조선인 독립군 중대 병력이 일본군과 백군 2개 사단을 막아선 적도 있다고 한다.

*****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스탈린의 결정은 조선인들이 일본군과 전쟁시 일본편에 설까를 우려했던 선제 조치라는 설이 유력했었지만 정반대의 견해가 나오고 있다. 스탈린은 일본의 시베리아 침략 당시 단결된 힘으로 일본을 물리치는 데 공헌한 조선인들이 일본을 자극해 소련을 침공할 구실을 줄까 두려워했으며, 특히 자긍심이 강한 조선인들이 독립 국가를 세운다면 다른 소수 민족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해 정권의 존망을 걸고 이주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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