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짬밥천국'의 성자, 육개장

[식담객 신씨의 밥상] 두번째 이야기-육개장



1995년 가을부터 2년 후 겨울까지, 26개월 동안 국방부에 머물렀습니다.

자연과 어우러진 국방색 옷을 입고, 애인 같은 M-16소총도 모시고 다니던 시절이었죠.


‘M16 라이플’을 ‘애무16’이라고 부른 건 단순히 영어 공부가 모자라서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우, 저질!)

20대 초반의 에너지는 혈기를 넘어 광기에 가깝습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온종일 삽질과 갈굼에 굴러도,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와 비비의 ‘하늘 땅 별 땅’에 열광할 에너지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 원천은 바로 왕성한 식욕과 소화력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복역(?)하던 논산훈련소의 식단은 안타까웠습니다.

취사병 10여 명이 2,300명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식재료를 정성스레 다듬고 맛깔스럽게 조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타오르던 청춘들은 십 원짜리 동전마저 씹어삼킬 듯한 소화력을 보유하고도, 식판을 바라보며 그늘 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곤 했습니다.

엄청난 양의 음식쓰레기가 남았고, 이 잔반은 딸딸이(경운기의 전문용어)에 실려, 인근 농가의 돼지와 닭을 살찌우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참고로 먹고 남은 밥 ‘잔반(殘飯)’이 ‘짬밥’으로 발음되며, 군생활 기간이 ‘짬밥’이라고 불리게 되었답니다.

그래도 그 ‘잔반천국’에서 우리를 기쁘게 한 성자가 계셨으니, 그 분의 존함 ‘육개장’이었습니다.


얼큰하고 깊은 국물에 푸짐한 고기 건더기, 여기에 당면과 채소와 달걀이 어우러져, 그나마 외부세계에 가장 가까운 ‘사제’의 맛을 선사한 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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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개장이 나온 날 아침엔, 군기 바싹 든 이등병부터 귀찮다고 아침 거르는 말년병장까지 모두의 표정에 사랑과 평화와 우정의 인간미가 넘쳐흘렀습니다.

이런 ‘육개장’을 육계장으로 아는 분이 많습니다.

아마, 고기 육(肉)에 닭 계(鷄)를 연상했기 때문일 겁니다.



짜장면을 짜장, 물냉면을 물냉이라고 일컫는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닭개장은 뭘까요?

닭을 넣어 끓였으니 닭계장(닭鷄醬)이라고 유추하는 경우들을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개장’을 씁니다.

닭개장은 ‘닭으로 만든 개장국’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오늘 점심으로 ‘육개장’을 먹었습니다.

술도 안 마셨는데 속이 쫙 풀리는 미스터리 현상을 겪으며, 오늘 저녁에 술에 젖으라는 계시는 아닌지 조심스레 헤아려 봅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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