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4년차 장수연(22·롯데)은 기량에 비해 운이 따르지 않은 선수로 분류돼왔다.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으로 2013년 데뷔했지만 준우승만 네 번 했다.
가장 뼈아픈 준우승은 함평골프고 시절이던 2010년 9월이었다. 아마추어 추천선수로 서울경제 여자오픈에 출전, 2위에 2타 앞선 선두로 경기를 마쳤다. 하지만 스코어카드 제출 직전 2벌타를 지적받았다. 캐디를 보던 아버지가 15번홀(파4) 플레이 때 선수 앞에 내려놓은 골프백이 문제가 됐다. 누군가의 제보가 들어왔고 경기위원장은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되는 행위였다고 간주해 경기 뒤 벌타를 줬다. 눈물을 쏟은 장수연은 연장에 끌려가 이정은(28·교촌F&B)에게 졌다. 첫 번째 준우승이었다. 이후 정규투어에 데뷔한 2013시즌부터 지난 시즌까지 매년 준우승 한 번씩을 보탰다. 대회 초반 스코어를 잘 벌어놓다 마지막 날 흔들리는 패턴이 반복됐다. 첫 준우승 때의 해프닝이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당시 그대로 우승했다면 데뷔가 2년 빨랐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10일 롯데스카이힐 제주CC(파72·6,187야드)에서 끝난 KLPGA 투어 롯데마트 여자오픈(총상금 6억원·우승상금 1억2,000만원). 2016시즌 네 번째 대회이자 국내 개막전으로 펼쳐진 이 대회에서 장수연은 ‘불운의 아이콘’ 오명을 말끔하게 씻었다. 공동 선두에 3타 뒤진 공동 10위로 출발한 장수연은 이날 최종 4라운드에서 8언더파 64타의 코스레코드 타이기록을 작성했다. 마지막 날 출전선수 61명 중 가장 잘 쳤다. 최종합계 13언더파를 기록한 장수연은 양수진(25·파리게이츠) 등을 2타 차로 따돌리고 데뷔 첫 승을 손에 넣었다. 73전74기다.
이제는 불운과는 거리가 먼 승부사로 불릴 만하다. 같은 조 양수진과 11언더파 동타로 마지막 18번홀(파5)을 맞은 장수연은 세 번째 샷을 그대로 홀에 넣어버렸다. 이 홀에서 장수연은 엄청난 장타를 날리고도 4번 아이언으로 친 두 번째 샷이 짧아 아쉬움을 남겼다. 뒤 조의 추격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연장만 가도 다행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같은 조 2명의 어프로치 샷을 신중하게 살피며 그린 스피드를 파악한 장수연은 완벽한 러닝 어프로치로 칩샷 이글을 터뜨렸다. 캐디와 손바닥이 부서져라 손뼉을 마주치는 장수연의 얼굴에서 그동안의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수연은 이날 이글 1개에 버디 7개(보기 1개)를 몰아치는 완벽에 가까운 경기를 했다. 초반 8개 홀에서 5타를 줄이며 기세를 올린 장수연은 9번홀(파5) 보기로 주춤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13번홀(파4)에서 3~4m쯤 되는 버디 퍼트에 성공해 단독 선두로 나서더니 숱한 위기를 넘긴 뒤 짜릿한 한 방으로 마무리했다.
장수연은 3년 전 이 대회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던 터라 더욱 뜻깊다. 당시 공동 2위를 했다. 올 시즌 첫 대회인 지난해 12월 현대차 중국여자오픈에서 단독 3위에 오르는 등 느낌이 좋았던 그는 지난달 30일 일찌감치 대회장에 내려와 준비한 끝에 대역전승을 완성했다. 장수연은 “마지막 칩샷 상황에서는 홀을 지나가게만 치자고 마음먹었는데 뜻대로 됐다”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롯데 챔피언십(14일부터 나흘간 하와이서)에 초청선수로 나가는데 그 전에 첫 승을 하게 돼 더 좋다”고 말했다. 그는 “6년 전 ‘그런 일’도 있고…. 우승 확정 순간 아버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며 감격해 했다. 장수연의 아버지 장귀선(58)씨는 갤러리 주차장에서 딸의 우승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양수진과 이승현(25·NH투자증권)이 2타 차 공동 2위로 마무리한 가운데 전날 공동 선두였던 아마추어 여고생 최혜진(17)은 10언더파 공동 4위로 마쳤다. 2주 연속 우승을 노렸던 조정민(22·문영그룹)은 8언더파 공동 6위, 이정민(24·비씨카드)은 6언더파 공동 10위다.
/서귀포=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