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은행에 단기로 쌓아놓는 돈이 급증하고 있다. 중장기적 자금 조달을 위해 정기예금을 하거나 신규 투자를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에 돈만 일시적으로 쌓아놓고 쓸 곳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른바 단기 상품으로만 시중 자금이 몰리는 ‘단기 부동화’인데 올해 경기 부진이 심화되면서 이 같은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20일 서울경제신문이 KB국민은행·신한은행·우리은행·KEB하나은행 등 주요 4대 은행의 지난 2014년 말 이후 기업예금 추이를 분석해본 결과 3월 말 기준 4대 은행의 기업 요구불 예금이 130조9,588억원으로 2014년 말(113조 6,336억원)에 비해 15.2%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전체 원화예수금이 8.4%만 증가한 것에 비교해보면 두 배에 가까운 증가폭으로 기업들의 ‘단기 파킹’ 자금이 가파르게 상승한 것이다.
단기로 돈을 맡기고 수시로 찾을 수 있는 기업 요구불 예금의 증가폭이 이처럼 큰 것은 내부 유보금을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은 최근의 경기 상황과 직결되는 문제로 보인다.
시중은행의 한 기업예금 담당자는 “대부분의 기업이 은행 요구불 예금인 수시입출금식 저축예금(MMDA)이나 증권사 환매조건부채권(RP) 등으로 보유하고 있는 단기 자금을 굴릴 뿐 대출도 활발히 일으키지 않고 투자처를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새해 들어서도 이 같은 추이는 계속되고 있다. 4대 은행의 요구불 예금은 올해 들어서만 3월까지 3조2,782억원이 늘어 2015년 말 대비 2.6%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체 원화예수금 증가폭은 1.4%에 불과한데 역시 2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반면 기업들이 은행에 1년 단위 장기로 돈을 맡기는 기업 저축성 예금은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3월 말 기준 4대 은행 기업 저축성 예금은 201조596억원으로 2014년 말(199조8,253억원)에 비해 고작 0.6% 증가하는 데 그쳤다. 2015년 말 기준으로 보면 기업의 저축성 예금은 1년 전보다 되레 줄어들기도 했다.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계속되는 저금리로 기업이 은행에 장기로 돈을 맡겨도 수익성이 형편없는데다 은행들 역시 기업의 거액 정기예금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은행권 기업예금 금리는 MMDA가 약 0.55% 수준이며 10억원 이상을 맡기면 1%가량의 특별 금리를 받을 수 있다. 1년 정기예금 금리는 고작 1.3%~1.5% 수준에 불과하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MMDA로 돈을 굴리면서 채권 등 새로운 단기 수신 상품을 찾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얘기다. 더불어 올해 대출 시장 위축으로 인해 기업과 마찬가지로 돈 굴릴 곳이 마땅치 않아진 은행들도 개인 예금보다는 높은 금리를 줘야 하는 기업들의 거액 정기예금을 사실상 사절하는 형편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업이 거액 예금을 맡긴다고 찾아와도 은행에서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며 “올해 은행들의 경영 기조가 대출 자산 성장보다는 내실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예전처럼 거액 예금을 수신하기 위해 발로 뛰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대기업의 자금 담당자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안정된 은행 예금을 통해 돈을 굴리는 것을 선호한다. 거액이라는 이유로 은행과의 협상을 통해 시중금리보다 높은 우대금리를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행들은 더 이상 이 같은 대기업들의 입맛을 맞춰주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대출할 곳도 없고 금리도 바닥인데 예금을 쌓아놓고 있어봐야 역마진 우려만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A은행의 경우 지난해 기업에 따라 5~10bp가량 대출 금리를 올리고 예금 금리는 내리면서 의도적으로 대기업 예금과 대출을 줄였다. 시중은행 여신 담당 관계자는 “최근 은행 여신부서의 주요 화두는 취약업종 기업 여신을 최대한 줄이고 우량 중소기업 여신으로 재편하는 것”이라며 “대기업 대출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거액의 대기업 예금을 맡아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은행권에서는 기업의 요구불 예금 규모로 볼 때 기업들의 내부 유보금 또한 상당한 수준일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정유 화학 업종의 경우 올해 저유가로 인해 수익성이 좋아지면서 유보금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문제는 그 돈들이 다시 투자될 곳을 찾지 못하고 은행도 받아주기 힘들다는 점”이라며 “시중에 돈이 없어 경기가 침체된 상황이 아니라는 점에서 최근의 경기 부진이 더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