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기준 우리 국민총소득(GNI) 대비 무역(수출입)의존도는 88.1%. 이 같은 현실에서 국내 최대 해운사 중 하나인 현대상선(011200)을 법정관리로 몰아넣을 경우 내년 재편되는 글로벌 해운동맹(얼라이언스)에서 탈락해 주요 수출입 항로를 잃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할 수 있다. 현대상선(011200)을 KDB산업은행의 자회사로 편입시키는 것은 ‘바닷길’을 지키기 위해 나온 고육책이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5일 미국 워싱턴DC에서 현대상선(011200)을 콕 짚어 “해운사 구조조정이 예정대로 되지 않으면 정부가 액션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발언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상선(011200)은 채권단과 조건부 자율협약을 체결하는 대신 선주사들과 협상을 통해 시장 가격보다 과도하게 높게 계약된 용선료(선박 대여료)를 인하하기로 했다. 하지만 영국과 그리스 선주들은 ‘불가’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 가운데 국가 경제수장인 유 경제부총리가 국제무대에서 현대상선(011200)의 법정관리 가능성을 직접 언급하면서 선주들은 용선료를 인하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STX팬오션(028670)과 대한해운(005880)이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 유럽 선주사들이 용선료를 못 받은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유 부총리가 구조조정을 ‘속도감’ 있게 하겠다고 밝힌 데 따라 정부는 이달 현대상선(011200)을 출자전환을 통해 최대 채권자인 산업은행 산하에 두는 결론을 발표할 방침이다. 현대상선(011200)의 운명을 빨리 결정해야 다음달부터 시작될 글로벌 해운동맹 재편 작업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현재 글로벌 해운사들은 4개의 해운동맹(2M·CKYHE·G6·03)을 만들어 세계 주요시장(아시아-유럽·미주, 대서양) 항로의 99%를 과점하고 있다. 한 업체가 보유한 선박량과 운행할 수 있는 항로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서로 뭉쳐 항로와 노선을 정해 정기적으로 물품을 실어나르는 체계를 만든 것이다. 현대상선(011200)은 일본 NYK, 독일 하파그로이드 등 6개사가 속한 G6에 속해 있고 한진해운(117930)은 중국 코스코, 일본 K라인 등 5개사가 속한 CKYHE 소속이다. 해운동맹 한 곳당 평균 선박 수는 222척, 선복량(선적 가능한 화물량)은 169만TEU(1TEU=20피트 컨테이너 1개)로 인천항 연간 전체 물동량(247만TEU)의 70%를 한 번에 담을 수 있다. 이 동맹체제에서 빠지면 주요 항로를 잃게 된다. 현대상선(011200)이 빚더미에서 탈출해도 영업할 무대가 없어진다는 의미다.
4개 동맹은 내년 3월께 동시에 재편된다. 이를 위해 해운사들은 5월부터 3~4개월 동안 협상을 통해 이른바 ‘짝짓기’에 들어가고 10월께부터는 200척이 넘는 배들에 대한 세계 주요 항로와 노선을 정해야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현대상선(011200)이 법정관리 절차를 밟게 되면 사실상 해운동맹에서는 탈락할 가능성이 높다. 해운동맹은 최저 3년 최대 10년의 장기계약인데다 정기적으로 전 세계 주요 항구로 운항해야 하는데 앞날이 불투명한 해운사와 함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상선(011200)에 더해 경영이 어려운 한진해운(117930)까지 새 해운동맹에서 탈락할 경우 우리는 바닷길이 봉쇄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국내 최대항구인 부산항만 해도 지난해 전체 물동량 1,943만TEU 가운데 절반 이상(51.87%)인 1,008만 TEU가 다른 항구로 가는 환적 물량이다. 국내 선사가 글로벌 해운동맹에서 빠지면 이 물량들은 바로 싱가포르나 홍콩항으로 갈 수 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최대한 빨리 현대상선(011200)에 대한 결론을 내고 앞으로 있을 해운동맹에서 우리의 이익을 챙겨야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