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킨키부츠’는 아버지에게 신발 공장을 물려받은 찰리(조엘 에저튼 분)가 갖은 풍파와 질곡의 시간 끝에 자금난에 시달리던 공장을 되살리는 이야기다. 경영난이 이어지자 찰리는 고심 끝에 대량해고를 고민하는데 이때 찰리에게 우연히 만난 여장 남자 ‘로라(치웨텔 에지오포 분)’가 일침을 가한다. “그(찰리의 아버지)는 공장이 벽돌이 아니라 사람으로 이뤄졌다는 걸 알았다. 그라면 당신과 같은 결정을 하진 않았을 거다.”
결국 찰리는 적자생존이 아닌 공존의 방식을 택하고 신발 공장은 직원들의 개성과 능력을 바탕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킨키부츠의 교훈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유효하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먹구름이 소상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현실에서 더욱 그렇다. 셰어 스토어(share store)인 ‘어쩌다 가게’가 주목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어쩌다 가게는 공간을 공유하는 상인 간에, 상품과 서비스는 물론 추억을 주고받는 상인과 손님 간에 일으킨 화학반응이 시너지를 내고 있는 ‘한국형 찰리의 공장’이다.
홍대역 3번 출구에서 나오면 경의선 숲길 공원이 펼쳐진다. 홍제천까지 1.3km가량 길게 뻗은 숲길 양 옆엔 각종 상점이 즐비하다. 150m 쯤 길을 따라 내려오다 두 번째 골목에서 우회전하면 2층 주택 하나가 눈에 띈다. 빨간 벽돌과 위로 길게 뻗은 굴뚝이 트레이드 마크인 ‘어쩌다 가게’다. 어쩌다 가게의 입구에 들어서면 작은 뜰이 나온다. 뜰에 놓인 2-3인용 원형테이블에는 손님과 입주자들이 자유롭게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차를 즐긴다. 뜰 우측으로는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어쩌다 가게는 일종의 대안 상가다. 짧은 계약 기간, 하루가 멀게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쫓겨날 위기에 처한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을 모아 둥지를 마련한 것이다.
어쩌다 가게를 기획한 곳은 공무점. 어쩌다 가게를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기 위해 설립됐다. 지난해 몇몇 건축인들이 ‘지속가능한 가게’를 직접 만들어 보자는 뜻을 모아 설립한 회사다. 이들은 2·6호선 홍대입구역 근처의 2층 주택을 임대해 보수공사를 했다. 그리고 5년간 월세를 동결하는 조건으로 입주자를 받았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올 3·4분기 기준 홍대 지역 평당(3.3㎡) 상가 임대료는 평균 12만3,800원. 1년만에 10만1,300원에서 20% 이상 급등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5년간 임대료 동결 조건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어쩌다 가게 2층에 자리 잡은 미용실 ‘바이 더 컷’의 김미영 원장은 “임대료도 시세 보다 저렴하게 책정해 입주자들의 부담을 줄였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입주자인 초콜릿 공방 ‘비터 스윗 나인’의 정지윤 대표도 “계약기간이 길다 보니 최소 5년간의 사업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며 “상인들은 안정적인 환경에서 창의성을 발휘하고 어쩌다 가게는 좋은 점포를 꾸준히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시너지”라고 설명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만드는 시너지
‘아(Ah) 스튜디오’의 이진아 씨도 어쩌다 가게의 매력포인트로 시너지를 꼽았다. 정 대표와 조금 차이가 있다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 재능을 나누고 협업하며 만드는 시너지를 얘기했다는 점이다. 이 씨는 “각자 만드는 것은 다르지만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 보니 독립적으로 자기 일을 하면서도 필요할 땐 언제든 협업할 수 있더라”며 웃었다.
아 스튜디오는 월화수 한의원에 매주 장식용 꽃을 바꿔주는 ‘위클리 플라워 서비스’를 제공한다. 월화수 한의원은 입주자들의 주치의다. 의원이 바로 옆에 있으니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든 진료를 받을 수 있다. 핸드백 전문점 바이커 스탈렛에선 에토프(실크스크린 공방)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삽화를 그려넣은 에코백과 휴대폰 케이스를 판매한다. 라운지카페에선 바이커 스탈렛 할인 쿠폰을 증정하기도 한다.
아래 사진들은 어쩌다 가게의 입주민들이 협업한 흔적들이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협동하고 있다.
이처럼 어쩌다 가게 속 사람들은 상부상조한다. 어쩌다 가게의 구조가 이 같은 협업 환경을 만든다. 입주자들이 1층에 있는 화장실과 뜰을 공유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통의 장이 마련됐다. 입주자들은 자연스럽게 뭉쳤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며 아이디어와 재능을 공유하고 또 자기만의 독창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낸다.
어쩌다 가게의 매력은 근처 상인들에게도 알려졌다. 지난 10월 연남동 동진시장에 주얼리 공방을 꾸린 새내기 소상공인 박다솜 씨는 점심식사를 할 겸 카페 라운지를 찾았다. 어쩌다 가게가 이색 카페로 입소문이 나자 이곳을 찾게 된 것이다. 애당초 카페만 방문하려 했던 박 씨는 카페 바로 옆 한의원과 수제화 전문점까지 함께 둘러봤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업종이 한 곳에 모여 시너지를 내고 있는 것이 박 씨에겐 사뭇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박 씨는 “꽃집 옆에 수제화 가게가 있고 한의원이 있고 이웃한 가게들이 협업하며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며 “진작 알았다면 어쩌다 가게에 공방을 차렸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안티 젠트리피케이션을 넘어 새로운 공존 방식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공존 모델이 각광을 받고 있다. 서울 성동구는 지난 9월 상생지구를 위한 자치구 조례(‘서울특별시 성동구 지역공동체 상호협력 및 지속가능발전구역 지정에 관한 조례’)를 공포했다. (추가내용) 지역 상권 발전을 위해 지속가능한 발전구역을 지정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주민 자치 협의체를 구성하여 외부 입점 업체를 선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조례에 명시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뚝섬역 근처에 당장 갈 곳이 없는 점포를 수용할 콘테이너형 박스숍(Box shop) 15곳을 건축할 예정이다. 이르면 내년 2월부터 가게들이 속속 오픈할 예정이다. 구 차원에서 젠트리피케이션에 정면 대응한 첫 사례다.
성동구와 어쩌다 가게의 사례는 쫓겨날 위기에 처한 임차인들에게 고무적인 이야기다. 젠트리피케이션 피해자들이 몸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정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무점의 안군서 대표는 “여럿이 모이면 문제에 대응할 수 있겠다 생각해 어쩌다 가게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진은혜 인턴기자 ggoster08@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