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을 떠난 백상 장기영이 지난 1952년 4월28일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했을 때 세인들은 놀랐다. 조선은행 청진지점 시절부터 쌓아온 인맥을 바탕으로 실업계에 투신할 것이라는 관측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지인들의 동정 어린 시선도 없지 않았다. 군소신문이 난립하고 사이비 기자가 판치던 시절이어서 언론과 기자에 대한 평판이 땅에 떨어진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다. 엘리트 의식이 강한 금융계에서는 아까운 인물을 하나 잃었다는 평까지 나왔다.
그러나 백상의 생각은 달랐다. 본인이 활발한 대외 기고활동을 펼쳤을 만큼 신문에 대해 개방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해방 직후 일본으로 떠나는 조선은행 청진지점의 일본인 동료들에게 ‘다음에는 신문 기자가 되어 상하이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석별의 정을 나눴다는 일화는 반 농담조였지만 언론에 대한 관심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언론인으로서 백상은 가히 미다스의 손처럼 손대는 일마다 성공을 만들어냈다.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한 백상은 공무국에 내려가 문선작업을 독려하고 가판을 직접 챙겼다. 백상이 재임한 2년 동안 부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백상이 조선일보를 타의로 나올 때는 새로운 매체를 만들려는 백상에게 유능한 인재들이 따라 붙었다. 태양일보를 인수해 1954년 6월9일 창간한 한국일보는 언론계에 선풍을 일으켰다. 한국일보는 특히 상업지를 표방했다는 점이 다른 신문들과 달랐다. 사회의 목탁이라는 허명과 정론지라는 타이틀에 빠진 채 정치 뉴스를 주로 쏟아내던 당시 언론 풍토에서 뉴스의 가치에 따라 독자로부터 인정받고 광고주에게서 광고 게재를 의뢰받는 상업지를 표방했다는 점은 시장주의자로서 백상의 신념에서 나왔다. 백상의 시장 중시는 7년 후 서울경제신문 창간으로 이어지게 된다.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 창간 무렵은 백상 장기영이 신문 제작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시기로 꼽힌다. 사장실에 야전침대를 설치하고 철야로 제작을 독려했으며 매일 아침 논설실·편집국 합동회의를 주재하며 사설의 제목과 집필 방향을 정하고 직접 사설도 썼다. 덕분에 서울경제와 한국일보는 젊고 다양하며 내용이 깊은 신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급속하게 세를 불려나갔다. 서울경제는 창간 직후부터 어떤 경제지와도 견줄 수 없는 부동의 1위로 뿌리내렸고 한국일보도 1960년대부터는 ‘정상이 보인다’며 신문 업계 1위를 향해 내달렸다.
신문 발행인으로서 백상의 감각은 남달랐다. 서울경제는 창간 일주일 뒤부터 ‘경제인 왕래’라는 고정란을 신설해 김포공항을 오가는 주요 인사들의 출국과 입국 예정일, 해외에서의 일정을 간략하게 실었다. 이를 위해 공항에 전담기자를 배치했는데 인원도 적은데 공항만 맡을 여유가 어디 있느냐는 불평이 없지 않았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해외 비즈니스나 공무원의 출장이 극히 적었던 시대에 누군가가 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면 그 자체로 중요한 경영정보가 될 수 있다는 백상의 생각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나타냈다. 최고경영자나 고위직 공무원 같은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을 뿐 아니라 서울경제 기자들도 양질의 취재원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계기가 됐다. 길목과 핵심을 중시하는 백상의 안목이 가져온 개가였다.
한국 언론에 항공기 시대를 연 주인공도 백상이다. 백상은 기자란 모든 관점에서 사물을 봐야 한다며 항공부를 창설하고 단발기와 쌍발기, 헬리콥터를 잇따라 사들여 다양한 항공사진을 서울경제와 한국일보에 실어 지면의 질을 끌어 올렸다. 5·16 직후 신문제작용 종이가 부족할 때는 몸소 작은 비행기에 몸을 싣고 서울과 부산을 하루에 두 번씩 왕복하며 신문용지를 실어 날랐던 적도 있다. 수해로 배달이 불가능한 지역이라도 생기면 백상은 항공기로 신문을 싣고 가 학교 등의 옥상에 뿌렸다. 독자와의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는 신념은 부수와 사세 확장으로 이어졌다.
백상은 1964년 5월11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단행한 개각에 따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했다. 개각 때마다 부총리 또는 재무부 장관으로 하마평이 나돌던 백상이었지만 외견상 개각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실제로 박 대통령은 백상을 오래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1년 여름 칠레월드컵 출전을 앞두고 공산권인 유고슬라비아 선수단의 방한도, 우리 대표팀의 원정도 용납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간 장기영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은 ‘자칫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설득한 끝에 최종 예선전을 치를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당시부터 백상의 능력을 눈여겨봤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식량난인 한창이던 1963년 8월 한국이 세계적인 곡물 부족 사태 속에서도 일본 미쓰이물산을 통해 캐나다산 밀가루 10만톤을 수입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막후에서 성사시킨 백상에게 박 의장은 고마운 감정을 숨김없이 표시했고 부총리 기용으로 이어졌다. 공식 외교 경로로도 진행할 수 없었던 곡물 수입을 위해 백상을 일본 내 인맥을 총동원, 미쓰이는 물론 미쓰비시도 물량을 대주는 협조를 얻어냈는데 한국이 수입한 캐나다산 밀가루는 당초 한국처럼 심각하지는 않지만 식량난을 겪고 있던 일본 국내용을 한국으로 돌린 것이어서 식량 밀사로서 백상의 공로는 더욱 돋보였다.
장관이나 측근들의 경쟁을 유도하고 힘을 집중해주지 않는 통치 스타일로 유명했던 박 대통령이 유독 백상에게만큼은 경제운용의 전권을 주고 경제부처 장관 인사권까지도 공유한 데는 신뢰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정일권 국무총리도 백상에게 ‘정일권 내각이 아니라 정일권·장기영 연립내각’이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경제는 백상에게 맡겼다. 어느 누구보다 강력한 권한을 갖고 경제부총리로 입각했지만 정작 상황은 최악이었다. 3공 출범과 동시에 민생고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으나 연이어 터지는 의혹사건과 1월 직할기업체(국영기업체)의 임금 인상 요구 데모, 2월의 3분 폭리 사건, 3월의 한일회담 반대 대학생 데모, 4월 국유재산 불하 의혹 사건을 거치며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특히 경제는 더욱 좋지 않았다. 도매 물가가 1962년 9.5% 상승에서 1963년에는 21%, 1964년을 통틀어서는 36.4%나 수직 상승하는 인플레이션 속에서 외환 고갈과 식량난 등 난제가 산적한 상태였다. 더욱이 5월 단행된 환율 인상으로 일반 국민은 물론 재계의 정부에 대한 불만과 불신도 심해지고 있었다.
경제난국 속에 등장한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취임식에서 ‘불도저’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취임사를 날렸다. ‘물가를 때려잡고 저축을 늘릴 테니 6개월만 참고 기다려달라.’ 백상의 호언대로 경제는 점점 펴져갔다. 여기에는 경제기획원에 힘을 몰아준 박 대통령의 리더십도 있지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정력적으로 일하던 백상의 열정이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한국 경제는 백상이 경제부총리로 재임하던 기간 중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고속성장 가도에 들어섰다. 경제기획원도 백상이 서울경제신문·한국일보 발행인으로 복귀한 1967년 10월까지 최강 경제부처로서 한국 경제의 고속질주를 이끌었다.
백상은 남북대화에서도 북측 대표단을 능수능란하게 상대해 대화를 주도했다. 북측 대표단이 서울의 많은 자동차를 보고 ‘전국에서 모으느라 수고했다’고 비아냥거리자 ‘아니, 자동차 모으는 것은 힘들지 않았는데 저 빌딩들을 다 옮겨오는 게 힘들었다’고 맞받아친 일화가 유명하다. 국회의원으로, 국제올림픽 위원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백상은 유신 이후 기자들을 해직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금융제재를 받으면서도 회사를 키워나갔으나 1977년 4월11일, 심장마비로 운명하고 말았다. 향년 61세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통 속에 백상은 떠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더욱 강해졌다. 백상이 남들처럼 평균 수명대로 살았다면 여야의 극한 대치도, 서울경제의 1980년 강제 폐간도 없었고 남북관계도 보다 잘 풀렸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갈수록 짙어졌다. 백상이 운명했을 때 시인 미당 서정주는 ‘백상을 처음 만났을 때 소사(말단 직원)인 줄 알았는데 사장이라고 해서 놀랐다’며 ‘그의 혼이 살아서 우리의 앞을 밝혀달라’고 소망했다. 백상 장기영 탄신 100주년, 불꽃같이 치열한 삶을 살았던 백상의 뜻은 오늘날 하늘 아래에서도 영원히 살아 있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