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적은 내부에 있다'…혼노지의 변



1582년 6월2일 오전6시, 교토의 사찰 혼노지(本能寺). 밤새도록 급속 행군한 1만3,000여명 병사들 앞에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당시 54세)가 나타나 칼을 빼며 외쳤다. ‘혼노지에 적이 있다.’* 막상 혼노지에 있었던 인물은 적이 아니라 미쓰히데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수백명의 다이묘(大名·영주)들이 일본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100년 넘도록 물고 물리는 살육전을 펼쳐온 ‘전국시대’에서 최종 승자의 지위를 굳혀가던 인물이었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 묵게 된 이유는 휴식. 최후의 전투를 지휘하기 직전에 쉬면서 작전을 구상하려 혼노지에 들렀다. 최대의 라이벌이며 기마군단으로 유명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가문을 멸문**시킨 직후여서 노부나가는 걸릴 게 없었다. 일본 통일이 눈 앞에 온 상황. 끝까지 저항하는 서쪽의 모리(森) 가문과 대치하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 구원 요청이 들어왔다.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에게 지원을 명령하는 한편 친정에 나선 참이었다.


미쓰히데는 왜 히데요시를 지원하지 않고 20년 가까이 충성을 바쳐온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을까. 434년이 지나는 오늘날까지도 그 원인은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해석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혼노지의 변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배신과 음모로 점철된 일본 역사를 통틀어서도 최대의 배반이라는 이 사건의 원인은 크게 7가지 정도가 꼽힌다.

주류는 원한설. 겉으로는 주군과 가신 관계였으나 노부나가가 불같은 성정으로 미쓰히데의 자존심을 여러 차례 건드려 앙심이 배반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직접 천하를 갖겠다는 미쓰히데의 야심설과 노부나가가 미쓰히데의 노른자위 영지를 빼앗을 예정이어서 경제력 추락을 우려한 나머지 선수를 쳤다는 영지 몰수설도 있다. 여기에 일본 통일이 다가오면서 점차 폭군으로 변해가는 노부나가를 징벌하기 위한 ‘독재자 제거를 위한 정의설’, 일본 국왕이 노부나가를 견제하려 은밀하게 명령을 내렸다는 ‘밀지설’이 회자된다. 심지어 예수회 음모론도 있다. 노부나가의 탄압을 예상한 예수회 소속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구테타를 사주했다는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와 미리 짰다는 정황도 있다.

수많은 해석이 쏟아지는 가운데 확실한 것은 사건의 결과 두 가지 뿐이다. 첫째는 노부나가의 운명. 70여명의 시종, 호위무사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던 노부나가는 최후의 순간에 혼노지에 불을 지르고 할복하며 49살 생애를 마쳤다. 두 번째는 권력 계승자. 하시바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뒤를 이었다. 최전방의 병력을 되돌려 쏜살같이 달려온 히데요시는 미쓰히데의 군대를 단칼에 물리치고 권력을 통째로 물려받았다. 이 과정 역시 미스터리다.***


말단병사 출신으로 한겨울에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에 안아 출셋길을 달리기 시작했다는 히데요시는 일본 최고의 권력자로 떠올랐다. 실권이 없던 허수아비였지만 일본 왕에게 도요토미(豊臣)라는 성까지 하사 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의 원흉인 바로 그자다. 혼노지의 변이 없었다면 관백이라는 최고 지위에 오른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임진년 조왜전쟁도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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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노지의 변이 발생한 지 꼭 10년이 지나 임진왜란(1592년)을 일으킨 히데요시가 사망(1598년)한 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삼켰다. 노부나가의 동맹이었으나 히데요시에게 굴종하며 인고의 세월을 겪어온 이에야스로부터 시작되는 도쿠가와 막부는 개항(1854년)까지 264년 동안 일본 근세를 지배했다. ‘노부나가가 지은 농사로 히데요시가 차린 밥상을 이에야스가 통째로 받아먹은 형국’이다.

각각 2살, 6살 터울인 세 사람의 성정을 ‘손 안의 새’로 빗댄 이야기도 유명하다. ‘지저귀는 새 소리가 듣고 싶은데 새가 울지 않을 때 다혈질인 오다 노부나가는 칼로 새를 베어버렸다. 히데요시는 새가 울도록 온갖 수단을 동원해 결국 울게 만들었다. 이에야스는 새가 스스로 지저귈 때까지 그저 기다렸다.’ 도쿠가와 막부가 장수한 이유는 인내와 ‘적은 혼노지(내부)에 있다’는 격언을 중시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서운 것은 외부보다 내부의 적이다.

* 아케치 미쓰히데는 수하 병력들에게 교토로 진군하는 이유를 거사 직전까지 밝히지 않았다. 오다 노부나가를 따르는 장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혼노지를 습격할 때도 오다 노부나가를 공격하는 적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혼노지에 적이 있다’는 말도 미쓰히데가 한 게 아니라 19세기에 작가들이 만들어 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럼에도 그의 명령처럼 쓴 이유는 일본에서 이 말이 ‘내부의 배신을 경계하라’는 의미의 관용구처럼 사용되고 있어서다.

** 다케다 가문을 끝장낸 인물과 시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이고 1582년이지만 실제 승부는 1575년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 갈렸다. 병력 차이는 노부나가·이에야스 연합군 3만5,000명에 다케다군 1만5,000명. ‘호랑이’로 불렸던 다케다 신겐이 병사했음에도 다케다군은 승리를 장담했다고 전해진다. 기마군단의 위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노부나가·도쿠가와 연합군을 크게 물리쳤던 맹장들도 건재했다. 전설적인 다케다 기마군단은 뎃포(조총)에 꺾였다. 노부나가는 이 전투에서 철포대(조총부대)를 3열로 구성해 교대로 사격하는 방식을 선보였다. 결국 다케다군은 1만2,000여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주하고 말았다.

일본의 중세 봉건시대를 마감한 전투라는 나가시노 전투는 경제전쟁이기도 했다. 단순히 맹장으로만 알려진 다케다 신겐이 기마부대를 키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남다른 경제 운용 덕분이다. 일본 역사상 첫 금화인 ‘고이시긴(碁石金)’을 주조하고 금은광산에 눈을 돌려 군사비를 확충한 인물이 바로 다케다 신겐이다. 노부나가도 마찬가지. 무기를 통일하고 동일한 군복을 일괄 지급할 수 있었던 경제력이 광산과 미개척 토지 개발, 신화폐 주조, 서양 신기술 습득 장려에서 나왔다.

*** 모리 가문과 대치하던 히데요시는 주군인 노부나가가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자 모리 가문과 협상해 휴전을 맺고 병력을 돌렸다. 혼노지의 변 발생으로부터 불과 11일 뒤, 히데요시는 2만4,000명으로 1만2,000명을 동원한 미쓰히데 군단을 무찔렀다. ‘당대 최고의 조총부대’를 운용하고 있다고 믿었던 미쓰히데는 몸을 감추고 도주하던 중 농부에게 붙잡혀 어이없게 죽었다고 전해진다. 히데요시가 어떻게 모리 가문을 설득했고 그렇게 짧은 시간에 병력을 재배치할 수 있었는지가 의문을 자아낸다. 병력 열세를 뻔히 알던 미쓰히데가 최후의 전투에 최정예 병력 3,000여명을 대동하지 않았는지도 미스터리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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