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이 RG를 너무 쉽게 봤습니다.” (A은행 여신 임원)
한때 은행권 수수료 효자로 주목받았던 선박 선수금환급보증(RG)이 이제 구조조정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로 부각되고 있다. 조선사에 대한 일반대출이 별로 없어도 막대한 RG 규모 때문에 은행들이 신속히 부실채권으로 여신을 재분류하기 어렵고 건조 중인 선박들이 인도될 때까지 구조조정을 끌면서 수조원을 다시 지원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수출기업 지급보증이 주업무인 국책은행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수수료에 목을 매고 불나방처럼 이 시장에 뛰어든 민간은행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 조선사 RG 규모로 수익기반 자체가 휘청거리고 있다. 조선업 호황의 열매가 독으로 변한 셈이다. 2일 금융당국 및 금융계에 따르면 현재 조선 7개사(대우조선·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현대미포조선·STX조선·성동조선·SPP조선)의 총 RG 규모는 50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대출채권 외에 익스포저 전액을 RG로 간주했을 때의 추산치로 실제 RG 규모는 이보다 작을 것으로 관측되지만 총 조선업 익스포저 80조원의 50~60%는 RG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례로 현재 조선 빅3 중 가장 문제가 심각한 대우조선 익스포저만 봐도 농협은행의 경우 총 1조 4,200억원의 익스포저 중 무려 1조3,200억원이 RG에 해당한다.
RG란 통상 선주가 조선사에 선박을 발주할 때 선수금을 지급하는데 조선사 문제로 선박이 계약대로 인도되지 않을 경우 RG에 가입한 금융기관으로부터 앞서 지급한 선수금을 환수하는 개념이다. 선수금 규모가 대형선박의 경우 수천억원에 달하다 보니 국책은행과 대형 시중은행들이 RG를 주로 취급해왔다.
RG 수수료는 통상 선수금의 0.03~0.05% 수준으로 대형선박 하나만 잡아도 은행들의 수수료 수익이 막대하다. 또 RG를 발급하면서 각종 부대거래를 할 수 있어 은행들은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이 시장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조선사 구조조정으로 선주로부터 ‘RG콜’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데다 RG도 일반대출 같은 익스포저로 간주돼 채권단 안에서 공동책임을 지는 구조가 되다 보니 은행들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옴짝달싹하기 힘든 처지가 됐다. STX조선해양을 빨리 법정관리로 보내지 못하고 질질 끈 것도, 대우조선 익스포저를 대부분 ‘정상’으로 분류하는 것도 막대한 규모의 RG가 원인 중 하나라는 게 은행권의 고백이다. 한 대형은행 임원은 “RG에 대한 제대로 된 공부 없이 수수료 장사에 눈이 멀었던 것이 결국 지금 이 위기를 불러왔다”고 토로했다. /윤홍우·김보리·임세원기자 seoulbird@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