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스타트업 삼성’이라는 새 구호를 외치고 나섰다. 열린 소통과 빠른 실행력을 가진 스타트업 정신을 자사에 주입해 체질 개선을 이루겠다는 시도다. 낡은 조직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는 한 더 이상의 혁신은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수직적 사내 문화, 비효율적인 보고 체계, 비합리적인 야근 등 시대에 뒤떨어진 조직 문화를 뜯어고치는 혁신 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수평적 조직 문화 구축을 위해 직급 체계를 단순화하고, 직무와 역할 중심으로 인사제도를 개편하는 것도 이번 혁신 작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삼성전자가 대대적인 조직 문화 혁신에 나섰다. 스타트업 조직 문화를 벤치마킹해 기업 문화를 수평적으로 바꾸고 임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적극 수용해 경영효율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3월 24일 수원 디지털시티에서 ‘스타트업 삼성 컬처혁신 선포식’을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윤부근 소비자가전부문 사장과 신종균 IT·모바일부문 사장, 이상훈 경영지원실 사장과 임직원 600여 명이 참석했다. 삼성전자가 외친 ‘스타트업 삼성’은 조직문화의 새로운 출발점이자 지향점을 동시에 담고 있는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에는 빠른 실행과 열린 소통을 지향하는 스타트업 조직 문화를 이식해 삼성의 지속적인 혁신을 꾀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수평적 조직 문화 구축
삼성전자는 지난해부터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하향식이 아닌 상향식 수렴 방식으로 임직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꾸준히 취합해 왔다. 인트라넷에는 사내문화, 복잡한 보고 체계, 할 일 없이 하는 잦은 야근 같은 비합리적 요소에 대한 지적이 올라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총 2만 6,000여 명의 임직원이 참여했고, 1,200여 건의 제안과 댓글이 쏟아졌다” 며 “이들 의견을 바탕으로 조직 문화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향후 개선방향에 대한 논의도 진행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스타트업 삼성 컬처혁신’ 선포식에서 발표한 ‘3대 컬처혁신 전략’은 이 같은 논의를 거쳐 나온 결과물이다. 3대 컬처혁신 전략은 임직원의 사고방식과 일하는 문화를 혁신하기 위해 수평적 조직 문화 구축, 업무 생산성 제고, 자발적 몰입 강화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우선 삼성전자는 직급 체계를 단순화하고 직무와 역할 중심으로 인사제도를 개편하는 쪽으로 큰 틀을 정했다. 인사제도 개편안은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다. 다만 일반직군의 5단계 직급 체계(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를 4단계(사원-선임-책임-수석) 이하로 축소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연공서열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능력과 효율성 중심으로 평가방식을 바꾸는 방안 등 인사평가 체제도 여러 각도에서 검토되고 있다.
둘째, 삼성전자는 업무 생산성 제고를 위해 비효율적인 회의·보고 문화를 개선한다. 불필요한 회의를 통합하거나 축소하고, ‘스피드 보고의 3대 원칙’인 동시 보고, 실무 보고, 간편 보고를 이행해 나가기로 했다. 임직원들의 승부근성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사원을 대상으로 의식교육도 실시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삼성전자는 임직원들의 자발적 몰입을 강화하기 위해 장시간 근무하는 문화를 개선하고 계획형 휴가 문화를 구축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눈치성 평일 잔업이나 주말 특근을 줄이고 다양한 휴가제도도 도입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이 같은 전략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스타트업 삼성 선포식 후 곧바로 야근 없는 날을 만들었다. 4월부턴 월급날인 매달 21일에 정시 퇴근을 하는 ‘패밀리데이’ 제도도 운영 중이다. 이 날 만큼은 야근은 물론 부서장 주관의 저녁 회식도 없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21일이 토요일인 경우에는 하루 전인 20일에 패밀리데이를 운영하게 된다”며 “앞으로도 꾸준히 패밀리데이를 운영해 사내에 정착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기업 문화 혁신은 이제 막 선포식을 마치고 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오는 6월 발표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발표하기 위해 태스크포스팀을 발족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할 순 없지만 여러 유관 부서에서 다양한 직급의 임직원들이 태스크포스팀에 합류했다”며 “하루 아침에 조직 문화를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로드맵을 구성해 장기적으로 변화를 꾀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생존을 위한 선택
삼성전자는 덩치가 커지면서 생길 수 있는 대기업 특유의 관료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시대 흐름에 뒤처진 사고방식과 관행이 지속된다면, 조직원들의 창의성 발현은커녕 글로벌기업들과의 경쟁에서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지금의 삼성전자를 만든 데에는 치밀하고 효율적인 관리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조직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런 문화는 창조 산업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 삼성전자를 이끌어왔던 주력 사업인 휴대폰과 반도체 시장은 수요가 둔화됐고 글로벌기업들과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가격경쟁력을 가진 중국 제품들은 하루가 다르게 삼성전자의 턱밑을 위협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조직 문화 혁신은 이 같은 상황에서 반등을 꾀하기 위한 포석으로도 볼 수 있다. 삼성전자의 매출은 2013년 228조 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14년 206조 원, 지난해 200조 원으로 조금씩 감소해왔다. 영업이익 역시 2013년 37조 원에서 지난해 26조 원으로 줄어들었다. 여전히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고 있지만, 성장세가 꺾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고 있던 터였다. 결국 삼성전자도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는 진단을 내리고, 조직 문화 혁신을 통해 돌파구 마련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스타트업일까? 스타트업은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개발해 사업에 도전한다. 빠른 보고 체계를 가지고 있고, 직원 간 소통이 자유로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글로벌기업 삼성전자와 스타트업은 문화나 근무 방식 모든 측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제조 부문 비중이 높은 삼성전자는 구글이나 애플과도 다르다. 삼성전자의 숙제는 창의성을 중요시하는 연구개발과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제조 부문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새로운 조직 문화의 혁신 키워드로 스타트업을 내세운 건 그들의 혁신 모멘텀과 창업 정신을 배워 창의적 기업활동을 배가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새로운 기술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자칫 흐름을 잘못 읽거나 현실에 안주하면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노키아와 닌텐도가 이를 잘 보여줬다.
스타트업을 배우려는 삼성전자의 시도는 하루 아침에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2013년부터 사내 창의 아이디어 육성 프로그램인 C랩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9개 프로젝트를 스핀오프(Spin Off·분사 후 창업)해 별도 벤처기업으로 독립시키고 지분 투자 등으로 지원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실리콘밸리에도 주요 조직을 설립하고 기능을 강화해나가고 있다. 혁신기술 연구를 맡고 있는 삼성리서치아메리카(SRA), 인수합병과 전략적 투자 등을 통해 혁신기술 획득을 꾀하는 글로벌이노베이션센터(GIC),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삼성전자 부품 사업의 미래 성장동력을 개발하는 삼성전략혁신센터(SSIC)가 그것이다. 전직 삼성전자 출신 A 씨는 “2~3년 전부터 삼성전자는 실리콘밸리 현지 조직들을 통해 팀 단위로 결정하고 움직이는 스타트업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며 “실리콘밸리에 기반하고 있는 스타트업에 대한 이재용 부회장의 이해도도 높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강력한 혁신 의지
삼성전자가 스타트업 문화를 배우겠다고 선언한 것을 놓고 이재용 부회장식 체질 개선 작업이 본격화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그룹의 비주력 계열사를 과감히 정리하며 지배구조를 다시 손보고 있다. 어려운 경영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그룹 전체의 구조부터 가다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물리적인 사업구조 재편만으론 새로운 생존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21세기형 기업으로 변신하는 데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나서 낡은 조직문화를 청산하는 혁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이후 비효율적인 조직 체계를 조금씩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4월 도입한 ‘자율 출퇴근’ 제도가 대표적 예이다. 주 5일간 매일 출근, 하루 최소 4시간 근무, 주당 40시간 근무라는 세가지 원칙만 지키면 출퇴근 시간을 스스로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제도다. 제도의 좋은 취지가 현장에 제대로 전파되지 못해 실효성 있게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효율성과 창의성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삼성전자의 노력과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삼성전자는 여름철 반바지 착용 근무를 허용하고 노타이와 노재킷, 반팔 등 이른바 ‘쿨비즈’ 스타일 근무를 권장하고 있다. 또한 C랩 제도를 도입해 임직원들의 아이디어가 사업화할 수 있도록 지원도 하고 있다. 창의적 아이디어를 내면 1년간 마음껏 연구개발도 할 수 있다.
삼성그룹의 주력사인 삼성전자가 스타트업 방식의 조직 문화 혁신에 나서자, 이 같은 움직임이 다른 계열사로 확대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미 삼성증권이 성과 중심의 수평적 직급 체계를 도입하기 위해 ‘주임-대리-과장-차장-부장’으로 이어지는 전통적 직급 체계를 폐기하기로 했다. 삼성증권은 기존의 수직적 직급 체계를 탈피해 지점 영업직원은 모두 프라이빗뱅커(PB)로 호칭을 일원화하기로 했다. 본사 지원 직군도 ‘주임-선임-책임-수석’으로 직급 단계를 축소하기로 했다.
올해로 창립 47년을 맞은 삼성전자의 직원 수는 현재 10만 여 명에 달한다. 이런 거대 기업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창의적인 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을 했다. 삼성전자의 조직문화 혁신 시도가 성공할지 여부는 아직 예단하기는 이르다. 관행처럼 남아있는 기업 문화는 쉽게 바꾸기도 어렵다. 그러나 삼성전자 스스로가 변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삼성전자가 기업 문화 혁신을 통해 ‘세계 최대의 스타트업’으로 거듭나고, 글로벌기업의 위상을 이어갈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하제헌 기자 azzuru@hmg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