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801년전 민주주의, 마그나 카르타





1215년 영국 런던의 동쪽 외곽 러니메드(Runnymede) 숲. 국왕과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이 만난지 닷새째인 6월 15일 극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수세에 몰렸던 국왕은 63개 조항의 라틴어 양피지 문서에 날인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영국 의회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는 ‘대헌장(Magna Carta)’이 탄생한 순간이다.*


귀족들이 반기를 들었던 이유는 전제 정치. 무엇보다 중과세에 대한 반발이 귀족 반란을 불렀다. 국왕으로서 존에 대한 경멸감도 반란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존 왕은 누구인가. ‘로빈 후드의 모험’에 악덕 군주로 등장하는 존 왕, 바로 그 사람이다.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에서도 존 왕은 역대 영국 군주 가운데 최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전쟁을 할 때마다 영토를 잃어 실지왕(失地王)으로도 불린다.**

존의 악행 시리즈는 헤아리기도 어렵다. 부친 헨리 2세와 형인 사자왕 리처드를 배반했을 뿐 아니라 왕위계승권자인 조카 살해를 사주했다는 의혹 속에 왕위에 올랐다. 항거하는 귀족의 부인이나 딸을 욕보여 수많은 사생아도 낳았다. 걸핏하면 프랑스와 전쟁을 펼쳐 노르망디를 포함한 영국 왕실 소유의 알토란 같은 대륙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다.

존에게 가장 큰 문제는 돈.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존 왕은 세금을 짜냈다. 즉위 첫해 1199년 2만7,000파운드였던 세금이 1211년에는 14만5,000파운드로 5배 이상 올랐다. 쌓이고 쌓인 불만이 터진 것은 1215년 5월. 프랑스와의 전쟁자금을 마련한다며 세금을 올리고 귀족의 토지를 빼앗자 반란이 발생했다. 교회도 귀족 편을 들었다. 대헌장의 첫 페이지는 ‘교회의 특권 인정’으로 채워졌다.

국왕 존은 귀족들과 약속한 헌장을 제대로 지켰을까. 정반대다. 준수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단지 국면 전환을 위한 시간벌기용이었을 뿐이다. 국왕은 양피지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 무효를 주장했다. 교황도 국왕 편을 들었다. *** 63개 조문 발표 두 달 만에 교황은 ‘국왕의 날인은 무효이며 러니메드의 합의를 주장하는 자는 교회에서 축출, 파문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개혁을 원치 않았던 교황청의 제동에도 대헌장은 외세 프랑스까지 끌어들인 귀족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살아 남았다. 러니메드의 회동 1년 4개월 만에 존 왕이 죽고 9세 나이로 등극한 헨리 3세는 귀족들의 종용으로 1217년과 1225년 연이어 헌장의 내용을 재확인했다. 헨리 3세는 노년에 아들과 힘을 합쳐 귀족 세력을 눌렀으나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헨리 3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1세부터는 평민 출신들도 포함된 의회가 영국 정치의 주요 장치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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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보통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17세기의 대법관이자 법학자인 에드워드 코크에 따르면 마그나 카르타 제정 이후 약 200여년간 역대 국왕들이 지키겠다고 약속한 횟수만 55번에 달한다. 속으로는 불만이었어도 귀족 또는 평민으로 구성되는 의회와 충돌하지 않겠다는 협치(協治)의 정서가 발동된 셈이다.

마그나 카르타가 민주주의 발달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익히 아는 대로다. 초기에는 극소수 귀족에게 국한됐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점차 일반 시민들에게 확대 적용된 게 영국 민주주의의 역사다. 권리청원(1628년)과 권리장전(1689년)을 거친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은 미국 독립선언서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보다 주목할 대목은 자본주의가 성장할 토양까지 마련됐다는 점. 1233년 대헌장은 39개 조항으로 축소됐지만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권 존중,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 불가의 원칙은 보다 명확해졌다. 산업혁명의 밑거름으로 작용한 영국의 농업혁명도 개인의 재산권이 중시되는 분위기에서 일어났다. 경제사가이자 투자전문가인 윌리엄 번스타인은 명저 ‘부의 탄생’을 통해 이렇게 간파했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곳에서 경제가 성장한다. 대헌장은 서구 경제의 폭발적 고도성장을 이끈 도화선이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1215년의 헌장이 서문과 63개조로 이뤄진 것은 확실하지만 처음에는 따로 조항을 나누지 않고 열거한 문서였다. 63개조의 분류는 훗날 역사가들이 편의를 위해 분류한 것이다. ‘마르나 카르타’라는 이름도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보통 마그나 카르타라고 하면 존왕의 아들인 헨리 3세가 반포한 1225년의 헌장을 지칭한다. 정식 명칭인 ‘잉글랜드의 자유권에 대한 대헌장(Great Charter of the Liberties of England)’라는 이름이 널리 통용된 것도 1297년 이후부터라고 한다. 그럼에도 나중에 나온 문서들의 내용이 러니메드에서 처음 나온 헌장과 비슷하기에 마그나 카르타의 탄생은 1215년으로 간주된다.

** 존 왕의 가계도와 출신 배경,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지난 ▲‘세기의 재혼, 콩가루?’▲ 에서 다뤘다. 이 시기는 영국사를 통틀어 얘기 거리를 가장 많이 남긴 시대로 손꼽힌다.

*** 교회의 재산을 빼앗아 교황 이노센트 3세에게 파문까지 당했던 존은 ‘영국왕은 교황의 신하’라며 머리를 조아려 다시금 신임을 얻었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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