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기고] 아직도 인감도장에만 의존하시나요

김성렬 행정자치부 차관



지난 2004년 한 사회사업가가 대학에 120억원의 유산을 기부하면서 ‘날인(捺印) 없는 친필 유언장’이 무효라는 논쟁이 발생했다. 대학과 유족 사이에 벌어진 ‘무효 소송’에서 법원은 유족의 손을 들어줬는데 우리 사회에서 ‘도장을 찍는다’는 행위의 무게감을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다.

미야자키 마사카츠 일본 홋카이도대 교수의 저서 ‘하룻밤에 읽는 물건사’에 따르면 기원전4000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미 원통형 점토에 조각한 인장이 사용됐다. 우리나라는 ‘삼국유사’에서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에서 “… 중신들이 의논해 8대 신대왕(新大王)을 맞아 무릎을 꿇고 국새(國璽)를 올리며 말하기를…”이라는 기록을 보면 인장이 오래전부터 통용됐음을 알 수 있다.

“돈은 빌려줘도 도장은 빌려주지 말라”는 말처럼 그 사람의 신표(信標)로 여겨진 우리의 인감제도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식민통치 수단으로 강제 도입됐다. 조선총독부가 인감을 신고한 사람에게만 인감증명을 발급했고 이것이 없으면 토지 등의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처럼 지난 100년간 폭넓게 활용된 인감제도는 도입 초기 어두운 측면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경제사회 발전에 순기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도장을 제작·관리해야 하고 거주지 주민센터에 신고해야 하는 불편함과 인감의 위조·변조 및 부정 발급 등의 부작용은 인감을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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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도 6∼7세기부터 인장이 공문서에 사용돼 널리 쓰였지만 18세기 이후 문맹자가 줄면서 대부분 서명으로 대체됐다. 이처럼 오늘날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은 공적·사적 거래에서 서명이나 공증을 사용하는데 미국·독일·스웨덴에서는 신분증에 서명을 기재해 이용하고 있고 영국·프랑스는 전자서명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이제 인감제도를 운영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대만 정도다. 이에 정부는 서명이 보편화한 시대 흐름에 맞춰 인감제도를 대체하기 위해 2012년 ‘본인서명사실확인제도’를 도입했다. 본인서명사실확인제도에 따르면 전국 어디서나 신청인이 시·군·구청, 읍·면·동사무소를 직접 찾아가 본인의 서명을 등록하면 인감증명서와 동일한 효력을 가지는 ‘본인서명사실확인서’를 발급받아 사용할 수 있다. 또 공인인증서를 통한 인터넷 인증, 전화 인증으로 집이나 직장에서도 ‘전자본인서명확인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본인서명사실확인서를 발급받을 때 사용 용도와 거래 상대, 위임받는 사람 등을 기재한 후 본인이 직접 서명하기 때문에 대리 발급에 따른 법적 분쟁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고 인감도장 분실 등의 위험도 없다. 이렇듯 편리하고 안전한 제도지만 본인서명사실확인서 발급률은 아직 인감 대비 5%를 넘지 못하고 있다. 국민도 아직 인감에 더 익숙하고 은행 등 수요기관도 관행으로 인감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본인서명사실확인서 발급 절차를 간소화하고 신청인이 직접 수기로 작성하던 사항도 전산으로 입력하게 하는 등 불편 사항을 대폭 개선했다. 국민의 불편을 해소하고 경제 활동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본인서명사실확인제도가 하루빨리 정착돼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국민 행복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성렬 행정자치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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