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업은 진입장벽이 아주 높은 산업이다. 하물며 은행이 외국 시장에 진출해 성공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게 현실이다. 2000년대 이후 국내 은행들은 너도나도 ‘해외 진출’의 깃발을 치켜들고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손에 받아 든 성적표는 그다지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최근 국내 은행들은 해외 사업에서 점차 긍정적인 변화의 조짐을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신한은행은 해외 사업 당기순이익이 전체 당기순이익의 10%를 돌파하면서 의미심장한 진전을 일궈내고 있어 은행권의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다. 신한은행의 해외 사업을 진두지휘하는 허영택 부행장(글로벌사업그룹장)을 만나봤다.
지난 5월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는 ‘은행의 글로벌 역량 제고를 위한 간담회’가 열렸다. 금융감독원이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국내 은행들의 해외 사업 담당 임원들이 대거 참석해 열기가 뜨거웠다. 그만큼 국내 은행권의 해외 진출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방증이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신한은행의 베트남 시장 진출 사례가 발표됐다. 발표자는 다름아닌 허영택 신한은행 부행장이었다. 그는 신한베트남은행 법인장으로 근무하면서 직접 드라마틱한 실적 변화를 이끌어낸 주인공이다. 다른 은행 해외 사업 담당 임원들은 그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했다.
허영택 부행장은 2013년 신한베트남은행 법인장으로 취임해 3년간 재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신한베트남은행은 개인 대출 부문에서 놀라운 실적 증가를 달성했다. 지난 2012년 신한베트남은행의 개인 대출 총액은 약 700만달러를 기록했다. 하지만 허 부행장이 법인장으로 부임한 2013년부터 개인 대출 규모가 껑충껑충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해 3100만 달러, 2014년 5600만 달러, 2015년 1억1500만 달러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는 2억 달러 돌파가 예상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비결은 ‘철저한 현지화’에 있었다.
허영택 부행장은 말한다. “한국계 은행들은 한국 기업과 교민 대상 영업을 위해 처음 해외 진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기업과 교민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은 한계가 명확합니다. 해외 사업에서 성장하려면 반드시 현지 시장을 뚫어야 해요. 저는 신한베트남은행 법인장 취임 후 다른 은행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봤습니다.
사업 모델의 차별화죠.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 은행들의 리테일(소매금융) 영업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 은행만큼 고객 요청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친절하게 서비스하는 은행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한베트남은행은 리테일 사업 확대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현지인 대상으로 리테일 영업을 하려면 말이 통해야 할 것 아닙니까. 즉 인력 현지화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현재 신한베트남은행의 현지인 직원 비율은 약 95% 정도 됩니다. 또 현지인 지점장 양성 프로그램을 도입해 지금까지 5명의 현지인 지점장을 배출했습니다. 현지인 지점장 양성 제도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현지인 직원들에게 ‘언젠가 나도 지점장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꿈과 희망을 불어넣기 때문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열심히 일하게 되는 겁니다.”
신한베트남은행의 급성장 이끈 주인공
신한베트남은행의 현지인 지점장 기용에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본사에서 강하게 반대하는 의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뭘 믿고 전결권을 주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허 부행장은 본사와 줄다리기를 벌인 끝에 결국 현지인 지점장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는 말한다. “현지화를 한다면서 현지인 직원들을 못 믿고 권한을 안 주면 어떻게 현지화가 가능합니까. 물론 딜레마는 있습니다. 권한을 주자니 사고를 칠 것 같고, 안 주자니 사업 진도는 안 나가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현지인 지점장을 발탁해놓고 보니까 잘하더라고요(웃음). 지금까지 우리나라 은행들은 한국인 주재원을 보내서 해외 사업을 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글로벌 은행들은 사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씁니다. 이게 엄청난 차이를 만듭니다.”
신한베트남은행은 베트남 당국으로부터 우수한 외국계 은행으로 평가받아 각종 상(賞)도 여러 차례 받았다. 그 덕분에 베트남 현지 네트워크 확장도 탄력을 받고 있다. 현재 신한베트남은행의 지점 수는 14개다. 올해 4개 지점이 추가 개설되면 총 18개로 늘어난다. 이렇게 되면 기존 최다 점포망을 가진 외국계 은행 HSBC를 넘어선다. 신한베트남은행이 현지 당국과 고객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베트남에서 가장 대표적인 외국계 은행으로 도약하는 셈이다.
신한은행의 글로벌 사업 확대는 전사적인 역량을 집중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 상황이다. 조용병 신한은행 행장은 지난해 3월 취임 후 핵심 경영방법론을 담은 ‘G.P.S Speed-up’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G.P.S는 글로벌화(Globalization), 플랫폼(Platform), 세분화(Segmentation)의 첫 글자에서 따온 말이다. 신한은행 측은 ‘G.P.S Speed-up’의 의미를 ▲글로벌 사업 확대 ▲채널, 상품, 서비스, 정보, 노하우 등 자원의 창조적 융·복합을 통한 새로운 가치와 기회의 구축 ▲세분화된 상품과 전략 ▲소통을 통한 신속한 의사결정을 함축하는 경영방법론으로 설명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역시 글로벌 사업 확대다. 신한은행의 글로벌 사업 비전은 ‘차별적 현지화를 통해 지역별로 독자 생존 가능한 신한은행 구축’으로 요약된다. 특히 신한은행 한국 본사의 강점을 해외 현지에 창조적으로 접목함으로써 차별화된 비즈니스모델을 구축하는 것이 골자다. 달리 말하면 ‘제2의 신한은행’을 해외 현지 곳곳에 세워나간다는 전략이다.
허영택 부행장이 설명을 덧붙인다. “신한은행 글로벌 사업의 기본 전략은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 세계화와 현지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영방식)이라는 큰 틀 아래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는 핵심 해외법인 중심으로 역량을 집중하는 겁니다. ‘선택과 집중’ 전략이죠. 각 국가별로 현지 특성에 맞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추는 한편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모델을 구축해 한국 신한은행처럼 하나의 완벽한 은행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게 골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글로벌 사업은 선택이냐, 필수냐의 차원을 넘어 생존의 문제입니다. 글로벌 사업을 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미 일본계 은행들이 먼저 보여줬습니다. 일본계 은행들은 오랜 경기침체와 저금리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해외로 나갔습니다. 우리나라도 저성장, 저금리, 고령화 등 여러 면에서 일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 더 지나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 올 겁니다. 그래서 신한은행은 글로벌 사업 확대에 전사적인 명운을 걸었습니다.”
‘매트릭스 조직’ 도입해 글로벌 사업 효율화
신한은행은 올해 초 글로벌 사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매트릭스(Matrix) 조직’을 도입했다. 본사의 전체 부서가 각자의 기능을 수행하는 동시에 해외법인 운영을 지원하는 구조로 조직 체계를 바꾼 것이다. 가령 본사의 리테일 부서, 기업금융 부서, 투자은행 부서, 리스크관리 부서 등이 각자 고유 업무 영역에서 해외법인의 사업 진행에 관여하는 식의 조직 체계를 의미한다. 국내 은행권에서는 신한은행이 해외 사업에 매트릭스 조직을 도입한 것을 선진적인 시도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사실 글로벌 은행들은 거의 대다수가 매트릭스 조직으로 해외 사업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영택 부행장은 “글로벌 사업에서는 매트릭스 조직의 장점이 상당히 많다”며 “조직 체계 변경 등 다양한 실험 과정을 거치고 나면 더 강한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허 부행장은 올해로 은행 근무 경력 30년째를 맞은 베테랑 금융인이다. 그는 1987년 신한은행에 입사해 첫 10년간 일선 지점에서 근무했다. 그 후 여신심사 전문가의 길을 걷던 그는 우연히 ‘국제통’으로 주특기가 바뀌게 됐다. IMF 외환위기가 들이닥친 1998년 뉴욕지점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 출발점이었다.
허 부행장이 회고한다. “1990년대 당시 은행 직원들이 가장 선망하는 부서가 국제부였어요. 그런데 국제부 직원이 아닌 여신심사부 심사역으로 근무하던 제가 뉴욕지점으로 발령이 난 거죠. 뜻밖이었습니다. 그런데 뉴욕지점에 가서 보니 부실대출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더군요. 그때 제가 그곳으로 발령을 받은 이유를 알게 됐죠. 어쨌든 당시 뉴욕지점에 근무하면서 부실대출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돌아왔습니다(웃음).”
2004년 신한은행은 이른바 ‘1인 주재원’ 제도를 도입했다. 세계 각지에 직원들을 파견해 시장 조사 · 개척 업무를 맡도록 한 제도였다. 허 부행장은 이때 제1기 1인 주재원으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시장 개척에 투입됐다. 오로지 홀로 미지의 시장에 던져진 것이다. 그는 “혼자 가서 거처와 조력자도 구하고 시장 조사와 영업도 하는 등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웃었다.
허 부행장은 점점 더 깊숙이 국제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2006년 인도 뉴델리 지점장 발령을 받아 거대한 잠재시장을 경험했고, 2012년에는 인도네시아로 날아가 현지 은행 인수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마무리 짓는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또 이듬해인 2013년에는 신한베트남은행 법인장으로 부임해 지난 3년간 엄청난 변화를 주도하는 선봉장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올해 초 드디어 신한은행 해외 사업을 총괄하는 글로벌사업그룹장에 발탁됐다.
신한은행은 2016년 6월초 기준 세계 19개국에 142개 글로벌 네트워크(법인, 지점, 사무소 등)를 보유하고 있다. 이 숫자는 2020년까지 24개국 230개로 더욱 늘어날 예정이다. 특히 해외 시장 중에서도 전략적 중요성이 높은 일본, 베트남, 중국, 미국, 인도, 인도네시아 등 6개국을 집중적으로 공략해나간다는 게 신한은행의 전략이다. 이 6개국이 이른바 ‘제2의 신한은행’을 구축할 일차적인 교두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일본 현지법인(SBJ은행)은 해외법인 중에서 자산이 가장 많고, 베트남 현지법인(신한베트남은행)은 수익 규모가 가장 크다. 자산과 수익 면에서 두 현지법인이 쌍두마차인 셈이다.
6대 핵심 해외법인 중심 ‘선택과 집중’ 전략
지난해 신한은행은 글로벌 사업에서 전체 당기순이익의 10% 이상을 벌어들였다. 전체 당기순이익에서 해외 비중이 10%를 돌파한 것은 해외 시장에 진출한 지 거의 30년 만의 일이다. 주목할 것은 2010년 이후 해외 수익 규모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최근 수 년 전부터 신한은행 글로벌 사업의 성장세가 본격화했다는 것이다.
신한은행은 더욱 가속페달을 밟아나갈 계획이다. 조용병 행장이 앞장서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조 행장은 2020년까지 해외 당기순이익 비중을 20%까지 높인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글로벌 사업을 총괄하는 허영택 부행장의 어깨가 꽤 무겁게 된 셈이다. 하지만 그는 시원시원하게 자신감을 드러냈다.
“행장님께서 어느 날 제게 ‘2020년까지 (해외 수익 비중) 20% 할 수 있어?’ 하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고 답했죠.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저는 글로벌 사업 성장에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큰 시대적 과제 중 하나가 청년 일자리 창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한은행의 글로벌 사업이 성장하면 한국에서도 해외법인 지원 조직이 커져야 합니다. 일자리가 더 생긴다는 거죠. 제가 6대 핵심 해외법인에 자주 말하는 게 있습니다. ‘1000만 달러씩만 더 벌어오라’고 말이죠. 1000만 달러면 대략 100억원입니다. 그 돈이면 200명을 채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글로벌 사업을 성장시켜 해외 현지 직원들에게 행복한 일터를 마련해주는 동시에 국내 고용창출에도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우리 세대가 해내야 하는 미션입니다.”
■ “글로벌 사업 성공하려면 세 가지 노력 필수”
허영택 부행장은 글로벌 사업을 담당하면서 수많은 외국계 은행들의 비즈니스모델 사례를 연구했다. 그가 ‘벤치마킹’을 한 외국계 은행만 해도 40~50개에 달한다고 한다. 직접 발품을 팔며 외국계 은행 관계자들을 만나 사업 현황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큰 장벽을 느꼈다. 미국, 유럽 등 선진시장을 본거지로 하는 대형 외국계 은행들은 글로벌 사업 경험이 100년에 달한다. 그러다 보니 비즈니스모델이나 노하우가 한국계 은행과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달러나 유로 등 국제통화를 기반으로 하는 금융기관 대상 비즈니스, 파생상품 거래, 증권 수탁·관리 서비스, 글로벌 자금관리 서비스 등은 한국계 은행이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외국계 은행들은 바로 이런 영역에서 글로벌 사업 수익의 40~50%를 올리고 있다는 게 허 부행장의 설명이다.
허 부행장은 말한다. “한국계 은행이 글로벌 사업에서 성공하기 어려운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원화가 국제화돼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한번도 성공해보지 못했다는 점이죠. 셋째가 바로 언어 장벽에 따른 소통의 문제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한국계 은행들은 글로벌 사업에서 수익을 내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이런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남들과는 다른 접근, 치열한 고민, 처절한 노력이라는 세 가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신한은행의 글로벌 현지화 활동
신한은행의 글로벌 현지화 전략은 ▲고객(영업) 현지화 ▲인력 현지화 ▲채널 현지화 등 세 가지로 이뤄진다. 먼저 고객 현지화를 위해 현지 맞춤형 상품 개발, 현지 타깃 고객 발굴, 고객관리 업그레이드, 리스크 관리 개선, 현지 전결권 부여 등 여신 제도 및 업무 프로세스 개선을 강화해나가고 있다. 또 인력 현지화를 위해서는 주재원과 현지 직원의 1:2 매칭을 통한 직무역량 육성, 현지인 부서장급 보임 확대, 주요 직무의 본사 핵심역량 전파, 현지 심사역 양성, 글로벌 인턴십 제도 도입 등을 추진해왔다. 채널 현지화는 기존 현지법인의 신규 지점 진출을 통한 네트워크 확장뿐 아니라 현지 은행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옵션을 다양화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사회공헌을 바탕으로 현지 사회와 밀착된 관계를 다져나가는 활동도 펼치고 있다. 특히 2015년 글로벌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전략을 확립해 저개발국 중심으로 CSR 활동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2016년에는 국가별 대표 사회공헌사업 발굴과 CSR 지원을 통한 글로벌 영업 시너지 증대라는 구체적인 과제를 설정했다. 특히 해외법인·지점 등을 포함한 글로벌 CSR 협의체를 운영함으로써 신속한 의사결정과 실행을 할 수 있도록 한 점이 눈길을 끈다. 이를 통해 글로벌 CSR 선도 은행으로 도약한다는 게 신한은행의 방침이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