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꿀맛 가득한 김치찌개

[식담객 신씨의 밥상] 열여섯번째 이야기-김치찌개



2008년 가을 어느 일요일, 여느때처럼 집에서 뒹굴대고 있었습니다.

기러기 아빠의 주말은 항상 그렇습니다.


외로운 금요일밤엔 음주 로봇, 속이 헤진 토요일엔 채소 인간 모드입니다. 그리고 상처가 아문 일요일엔 나무늘보가 됩니다.

‘짜라짜라짜’ 짜파게티 요리사는커녕 3분 짜장도 데우기 귀찮습니다.

온종일 TV 앞에 비몽사몽 누워있다가 리모컨이나 만지작거립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1박2일을 패밀리와 보내고 있는데, 나지막한 내면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라면이 어쩌고 파업이 저쩌고 하는 퉁퉁거림에, 가만히 귀를 기울입니다.

전날부터 밥이 없어 라면만 연속 다섯 끼 먹었더니, 밥통[위(胃)]이란 녀석이 식초공장으로 업종전환한다고 협박합니다.

팔보채랑 양장피 먹을 때는 주인님이 최고라더니, 고작 밥알 몇 번 걸렀다고 난리법석입니다.

성질 같아선 며칠 확 굶겨버리고 싶지만, 군자는 무릇 이틀에 한 번은 쌀밥을 먹는 것이 도리라 참습니다.

냉장고를 뒤적거립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고춧가루와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배추 아낙입니다.

차마 김치라고 부르는 건, 대한민국 전통발효식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냉동실에는 한 달 전 동네 바자회에서 싸게 산 물만두 청년이, 동상에 걸려 창백한 눈빛으로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찬장에서 동원예비군처럼 졸고 있는 참치 아저씨와 깍두기 머리를 한 스팸 청년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태어나 처음으로 김치찌개 끓이기에 도전합니다.

북어국을 끓이듯, 가열한 냄비에 포도씨유를 붓고 김치를 볶습니다.

새콤한 냄새가 부엌에 가득할 무렵, 냅따 아리수를 붓고 팔팔 끓입니다.

캔햄과 참치를 넣고 나니, 은근 맛있을 거란 기대감이 커집니다.

팔팔 끓은 찌개를 한 숟가락 입에 넣습니다.

이런 젠장찌개!

윤형빈 개그 마냥 밍숭맹숭합니다.

김치를 더 넣고, 황갈색 조미료도 투척합니다.

어차피 기러기 아부지 식단에서 웰빙은 요단강 건넌 지 오래라, 조미료를 좀더 푸짐하게 넣습니다.

이윽고 냄비가 거품을 물고 흥건한 침으로 가스불을 꺼주자, 다시 한 번 맛을 봅니다.

꿀맛입니다!

조미료인 줄 알았던 갈색 분말이 꿀처럼 달콤한 황설탕이었습니다.

나도 울고 밥통도 울고, 모두가 비탄에 잠깁니다.

냄비 속에 있던 아이들은 인생 그 따위로 저렴하게 살지 말라고, 저주 어린 욕설을 퍼붓습니다.


참치는 참 치사하다며 치를 떨고, 스팸은 다음 생에 이메일로 태어나겠다며 기름을 줄줄 뱉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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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에서 배추 아낙은 인도네시아에서 온 황설탕 녀석과 눈이 맞아 끈적거립니다.

긴 한숨을 내쉬고 조용히 녀석들을 위한 마지막 나들이길에 나섭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이들을 다음 세상으로 보내줍니다.

터미네이터 2에서 용광로에 빠진 T-1000의 모습이 재현되는 듯합니다.

그윽한 향냄새가 장례씩의 운치를 돋웁니다.

그렇게 음식물 쓰레기통 앞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집에 올라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밥통 녀석이 또 땍땍거립니다.

이 짜증을 참았다간 큰병에 걸릴 것 같습니다.

“자꾸 요딴식으로 깐돌거리면 신라면 용액으로 몸에 구멍을 내줄 테다!”

그 한 마디에 녀석이 찌그러집니다.

풀죽은 녀석이 측은해, 새우깡군과 참이슬양을 불러 달랩니다.

내 주제에 김치찌개는 무슨...

기러기 생활은 고단합니다.

이웃집에서 맛있는 음식냄새가 풍겨오는 주말엔, 사는 게 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눈치 없는 ‘꼬로록’ 소리가 끼니를 달랍니다.

그래, 밥 먹자.

어떻게든 살아보자.

살다 보면 언젠가 따사로운 날도 찾아오겠지.

그렇게 또 라면물을 올립니다.



이후 넣는 주재료에 따라 새로운 이름이 생겼습니다.

된장을 풀어 끓이면 된장찌개, 비지를 넣고 끓이면 비지찌개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엔 미군부대에서 나온 재료로 만든 부대찌개까지 나오게 됩니다.

토끼 자식과 여우 마누라가 함께 앉은 식탁 한 가운데, 뜨끈한 김치찌개가 있는 밥상풍경을 그려 봅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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