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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도시] 품위 있게 늙어가는...어린이대공원 ‘꿈마루’

40년전 원형 그대로 살려 리모델링..."시간여행의 출입구"

1세대 건축가 나상진이 설계한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의 원래 모습은 거대한 네 개의 기둥에 지붕이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었다. /사진=권경원기자1세대 건축가 나상진이 설계한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의 원래 모습은 거대한 네 개의 기둥에 지붕이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었다. /사진=권경원기자




모든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멸을 향해 간다. 이는 건축도 마찬가지다. 과거 유럽에서는 건축물이 시간이 흐르면서 깎이고 약해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에 따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건물이 좀 더 천천히 늙어가거나 품위 있게 소멸할 수 있는 방안을 고심했다. 하지만 근대건축으로 접어들면서 ‘늙어감’은 무조건 막아야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안에 위치한 ‘꿈마루’는 멋지게 늙어가는 건축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지난 1970년 준공 당시 골프장 클럽하우스로 탄생한 이 건물은 1973년 어린이대공원 개원 시 교양관으로 활용됐다. 이후 전면 철거의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근대건축 문화적 자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리모델링을 통해 현재의 꿈마루가 됐다.






●사라졌던 나상진의 건축

1970년 국내 첫 골프장 클럽하우스로 건축

기둥 위에 떠 있는 듯한 지붕 모습 ‘환상적’



40여년간 ‘교양관’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던 꿈마루는 사실 아예 헐리고 새로 지어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설계도면을 본 조성룡 성균관대 건축학과 석좌교수는 오랫동안 덧붙여지고 훼손된 이 건축물이 원래 뛰어난 건축미를 가졌다는 점을 파악했다.

거의 잊혔던 1세대 건축가 고(故) 나상진의 작품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도면 속 건물은 네 개의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 위에 지붕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도면 속 원래 건축물에 대해 조 교수는 “환상적”이라고 표현했다. 김종헌 배재대 교수는 ‘시간과 장소의 흐름을 연결하는 커넥터로서의 건축(공간 2011년 9월호)’에서 “김중업의 프랑스대사관, 김수근의 공간사옥과 함께 한국 현대건축의 최고 걸작”이라고 밝혔다.

당초 이 건물은 나상진이 골프장으로 사용됐던 어린이대공원 터에 1970년 국내 최초 골프장 클럽하우스(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 용도로 지은 곳이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골프장을 옮기고 대신 어린이를 위한 공원을 조성하라고 지시하면서 사용가치가 사라져버렸다.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교양관’으로 바뀌면서 노출 콘크리트에 페인트가 칠해지고 임시 합판 등이 덕지덕지 붙여졌다.

그 후 40여년 동안 어린이대공원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지만 막상 원래 건축물이 가졌던 특색이 사라진 교양관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존재하지만 사실상 사라진 건물이 된 것이다.

골프장 조망을 위해 유리로 덮여 있던 곳에는 철제 창틀을 설치해 이곳이 원래 어떤 공간이었는지 짐작하도록 했다. /사진제공=조성룡도시건축골프장 조망을 위해 유리로 덮여 있던 곳에는 철제 창틀을 설치해 이곳이 원래 어떤 공간이었는지 짐작하도록 했다. /사진제공=조성룡도시건축


●소멸을 향해 가는 건축

사무실로 쓰기 위해 쓰기 위해 새로 지은 ‘집 속의 집’

시간 지나며 썩는 재료 등 사용



리모델링에 나선 조 교수의 작업은 나상진이 탄생시킨 원래 모습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건물이 천천히 늙어갈 수 있도록 두는 것이었다.

40년 동안 필요에 따라 덧붙여진 외벽을 뜯어내고 콘크리트에 칠해진 페인트를 벗겨냈다. 강 위에 세워진 거대한 다리 같은 구조도 되살렸다. 클럽하우스로 사용되던 시절 골프장 조망을 위해 유리로 덮여 있던 외벽 부분에는 철제 창틀을 새로 설치했다. 이에 대해 조 교수는 “1970년대에 지어진 좋은 건축이었으니 당장 없애버리지 말고 올바르게 이용하다가 조금만 더 천천히 버리자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관리사무실 등으로 이용되는 3분의1의 공간은 ‘집 속의 집’ 형태로 새로 지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문제였다. 시민의 세금으로 짓는 공공건축인 만큼 건축비와 유지관리비를 줄여야 했다. 이에 따라 ‘집 속의 집’ 부분에만 전기와 수도 등이 들어오도록 하고 나머지는 내부인 듯 외부 같은 공간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꿈마루 안으로 들어서면 바깥의 바람과 소리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가운데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를 따라 빛이 천장에서 아래로 흘러들어오면서 이곳저곳으로 반사되기도 한다.


‘집 속의 집’ 역시 다른 공간처럼 시간을 거쳐 가며 자연스럽게 소멸할 수 있도록 붉은 벽돌로 지었다. 조 교수는 “나중에 쉽게 썩는 재료를 쓰는 것이 설계 원칙”이라며 “자연재료인 벽돌이나 나무·쇠 등을 사용하려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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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일 때 로커룸이었던 공간의 지붕을 걷어내고 이용자들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만들었다. /사진제공=조성룡도시건축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일 때 로커룸이었던 공간의 지붕을 걷어내고 이용자들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만들었다. /사진제공=조성룡도시건축


●한 공간에 담긴 세 개의 시간

클럽하우스→교양관→꿈마루로 3번 변화

노출콘크리트의 거친 질감, 낯선 경험 제공



어린이대공원 터는 굴곡진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변해왔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비(妃)인 순명황후의 능이 있었지만 1926년 능을 옮기고 골프장이 조성된다. 이후 1970년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가 지어지고 3년 만에 어린이대공원으로 바뀐다.

이 중 꿈마루는 클럽하우스부터 지난 40여년간의 시간을 오롯이 담아 보여준다. 이 공간을 찾는 사람들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를 통해 나상진의 시간을 엿볼 수 있으며 군데군데 덧칠돼 남아 있는 교양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붉은 벽돌의 새 공간은 꿈마루의 현재를 보여준다. 이를 두고 조한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저서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을 통해 “꿈마루는 시간여행을 떠나는 출입구”라고 지칭했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간 속에서 꿈마루는 어떤 공간일까. 계단 옆 벤치, 옥상 위 피아노, 정원 안 테이블 등 내외부의 모호한 경계 속을 파고드는 이들에게 제 품을 내주는 곳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노출 콘크리트의 거친 질감이 낯선 경험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조 교수는 “꿈마루를 노란 병아리색으로 칠해 아이들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며 “아이들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경험하면서 성장해간다”고 말했다.

골프를 치기 위해 골프백을 들고 내려오던 진입로를 꽃이 한가득 핀 정원으로 재탄생시켰다. /사진=권경원기자골프를 치기 위해 골프백을 들고 내려오던 진입로를 꽃이 한가득 핀 정원으로 재탄생시켰다. /사진=권경원기자




■ 건축사 나상진은.....

건축가 김수근·김중업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만 나상진을 아는 이는 드물다. 나상진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잊힌 건축가다.

나상진은 1924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1940년 전주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실무에 뛰어든다. 이후 1950년대부터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면서 1950~1970년대 대표적인 건축가로 자리 잡았다. 서울 남대문 그랜드호텔과 경기도청사, 후암동 성당, 제일은행 인천지점, 명동 한일관 등 150여개 건물을 설계했다.

대표작 중 하나인 정부종합청사 설계안은 그에게 시련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1967년 현상설계 공모전에서 당선돼 착공까지 했지만 정부에서 몰래 미국에 설계를 맡겨 현재의 높은 건물로 탄생시켰다. 당시 나상진은 주변 건물들과의 조화를 위해 옆으로 길고 상대적으로 층수가 낮은 건물로 설계했다.

1세대 건축가 나상진은 150여개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지만 기억에서 잊혔다. 지난 1963년 설계한 후암동 성당 전경.1세대 건축가 나상진은 150여개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지만 기억에서 잊혔다. 지난 1963년 설계한 후암동 성당 전경.


한 시대를 대표한 건축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나상진이 기억에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조성룡 성균관대 건축학과 석좌교수는 그의 학력을 원인으로 꼽는다. 조 교수는 “많은 건물을 설계했는데도 불구하고 건축계에서조차 이름이 거론되지 않아 살펴봤더니 나상진 건축가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더라”며 “학벌 위주 사회에서 그 배경이 없으니 연결고리가 끊어져버렸다”고 설명했다.

군사정권 시절 밀실정치가 이뤄지던 안가 등 정부 관련 시설을 다수 설계한 것도 약점이 됐다. 정치적인 건축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을뿐더러 보안상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못한 작품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권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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