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귀족과 부자가 먼저 죽겠으니…칼레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남을 위해 죽는 인간의 심정은 어떠할까. 프랑스의 유명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들(The Burghers of Calais)’에서 답을 엿볼 수 있다. 절망과 가련, 비애와 결기…. 조각상 여섯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두 가지. 처형을 앞둔 이들은 하나같이 말랐다. 피골이 상접해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이는 조각들을 깎는데 로댕은 5년 세월을 보냈다. 위대한 조상들의 혼이 담긴 불멸의 역사를 재연하려는 중압감이 그만큼 무거웠으리라.

로댕의 작품 소재는 1346년8월3일 발생한 영국군의 칼레 점령. 군대를 재편성하고 영국에서 보내는 군수물자를 받을 최적지로 꼽은 칼레를 따냈지만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분노를 뿜어냈다. 정예병력 3만4,000명이 시민 8,000여명을 누르는 데 11개월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마침 크레시 전투의 승전*으로 사기가 한층 올랐던 터. 에드워드 3세는 작은 항구도시인 칼레쯤은 도시락 까먹듯 접수하겠다고 여겼었다.


예상 외로 저항이 강해 오랜 공성(攻城) 끝에 겨우 점령**한 뒤 에드워드 3세는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다. ‘짐이 경고했던 대로 칼레 주민을 모두 죽여라!’ 몰살의 위기에서 주민 대표들은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무고한 양민을 죽이지 말아주십시오. 대신 우리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간청에 못 이긴 에드워드 3세는 ‘그렇다면 용서하마. 그래도 이토록 어리석은 저항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한다. 저항에 가장 앞장섰던 여섯 명이 삭발하고 목에 밧줄을 맨 채 맨발로 찾아와 처형대에 오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누가 먼저 죽을지를 놓고 칼레 주민들은 고민에 빠졌다. 목숨을 건지게 됐다는 안도감과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불안이 교차하던 때 가장 부유한 상인 피에르가 앞장섰다. 고위관료인 장 데르에 이어 그 아들, 지체 높은 자들이 서로 죽겠다고 나섰다.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드는 통에 지원자가 일곱 명으로 늘었다. 이튿날 아침, 피에르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원자 중에서 마음이 약해져 늦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들’은 지원자들이 피에르의 비보를 들은 순간을 묘사했을 성 싶다. 피에르의 소식에 마음을 다잡은 지원자들은 당당하게 영국군 진영으로 걸어갔다. 죽음을 자처한 주민 대표 6명을 접한 에드워드 3세는 적지 않게 놀랐다고 한다. 귀족과 부유한 상인이라던 이들마저 기나긴 농성으로 아사 직전의 마른 상태였다. 출산을 앞둔 왕비 필리파 ***도 태아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며 자비를 구했다. 결국 왕명이 내려졌다. ‘모두 용서하노라.’

감동적인 이야기는 로댕의 조각 뿐 아니라 수많은 예술작품에 남아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구술의 내용도 다양하다. 심지어 후대에 왜곡됐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시민대표들의 행위는 패자가 용서를 구하고 점령자는 자비를 베푸는 일종의 의식이었다는 것. 에드워드 3세 역시 이들을 처형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도 한다. 칼레의 이야기는 후대의 필요에 의해 재창조된 신화일 뿐이라는 얘기다.

무엇이 역사적 진실일까. 알 수 없다. 분명한 점은 한가지 뿐이다. 칼레의 지도층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정신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근대 이후 지금까지 주류국가들의 시대 정신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고귀한 자일수록 먼저 책임을 진다’는 근대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원형이 바로 칼레의 시민들이다.


단언할 수 있다. 적어도 로댕이 칼레의 시민들을 조각한 이후, 즉 19세 이후부터 성공했다는 나라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사회적 풍토가 없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몰락을 확인한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승부는 이튼의 교정에서 갈렸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귀족 계급의 명문학교 출신일수록 전사자가 많았다는 뜻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육군 사령관이던 노기 장군은 두 아들을 뤼순 고지 전투에서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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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붉은 별’ 마오저뚱은 장남이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에 ‘시신을 중국으로 옮기지 말고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대하라’고 했다. 그의 시신은 평양에 잠들어 있다. 한국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미국 고위층은 무수히 많다. 세계의 이공계 석학들이 미국에 몰리는 이유도 2차대전에서 미국 공대생들의 태반이 전사해 해외 대학생에게 문호를 개방한 덕분이다. 이공계에 대한 병역 특례를 당연한 권리나 국제경쟁력의 원천으로 여기는 나라도 우리 밖에 없다. 정글 자본주의가 판친다는 미국에서도 부유층은 노년에 이르면 거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게 관례다. 부자가 존경받는 풍토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부럽고 답답하다. 칼레 주민들의 용기와 영국 왕의 관용, 다른 나라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부럽기 짝이 없다. 동시에 답답한 감정이 치민다. 우리에게 670년 전 칼레의 용기와 희생이 있는가. 많이 공부하고 배운 자일수록 권력에 아부한다. 사회악을 해소해야 할 검사들은 스스로 악이 되어버렸다. ‘사드 성주 배치는 대통령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초선의원도 있고 의경 복무 중인 아들의 특혜 시비에도 흔들림 없는 검사 출신 청와대 참모도 있다. 부끄러움은 어디 갔는지…. 이 땅의 가진 자들은 왜 이리도 천박한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크레시전투(1346년8월)는 외교전과 해전 위주로 치러지던 백년전쟁(1337~1453) 최초의 대규모 지상전. 예상을 뒤엎고 영국이 압승을 거뒀다. 프랑스는 총병력 4만명(용병인 제노아 석궁수 8,000명 포함) 가운데 기병만 1만2,500기를 보유했다. 다 모아야 1만 2,000여명 뿐인 영국은 웨일즈 장궁병을 앞세워 크게 이겼다. 제후와 기사 집단이 농민과 산악지방 출신의 장궁병들에게 철저하게 당한 이 전투는 근세를 앞당겼다. 중장갑 기사의 시대가 저물고 각국은 저비용 고효율 군대 양성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 영국은 점령 211년 만인 1558년 칼레를 상실, 국가적 충격에 빠졌다. 한 줌 밖에 안 되는 작은 항구였어도 마지막 대륙 영토였기 때문이다. 주력 수출품인 양모의 집산지로서 칼레에서 걷히는 관세가 왕실 재정수입의 35%를 차지했기에 경제적인 타격도 컸다. ‘영국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라던 칼레를 빼앗긴 이유는 두 가지. 정실에 치우친 통치자와 군대의 타성 탓이다. 여왕 메리 1세는 9년 연하의 남편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명분도 준비도 없이 스페인·프랑스 전쟁에 참전해 화를 불렀다. 영국군 수비대는 칼레의 요새 두 곳을 난공불락으로 믿고 프랑스군의 야습도 모른 채 신년관습에 따라 밤새 술을 마시다 거점을 잃었다.

프랑스를 얕보고 수비대의 구원요청을 묵살했던 메리 1세 여왕은 막상 칼레 함락 소식을 듣고 ‘내가 죽으면 심장에 칼레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한탄한 뒤 10개월 뒤에 숨을 거뒀다. 영국인들은 광신도이자 폭군이던 메리의 죽음을 반겼지만 사기는 더없이 떨어졌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존경받는 이유는 이런 상황에서 등장해 종교적 화합과 외교술로 대영제국의 기반을 다졌기 때문이다. 평가가 하늘과 땅 차이인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를 구별할 수 있는 키워드는 아집과 화합이다.

*** 오늘날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지방인 저지대 출신의 필리파 왕비는 존경받는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에드워드 3세의 부재시 스코틀랜드와 전쟁에 직접 나서고 남편에게 자비와 관용을 요청한 적이 많았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퀸스 칼리지가 그녀에게 헌정된 단과대학이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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