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속 급속 행군으로 지친 군대가 있다. 지휘관은 무능할 뿐 아니라 자만에 빠졌다. 제 아무리 장비와 보급이 적보다 우위라도 이런 군대가 전투에서 이길 수 있을까. 백전백패하기 십상이다. 1,638년 전인 378년8월9일 아드리아노플 전투가 딱 이랬다. ‘무적 로마군’의 신화도 이 전투로 깨졌다. 이전까지 로마군은 한번 지더라도 끝내는 승리를 쟁취하는 상승의 군대였으나 이 전투 이후 게르만족을 비롯한 온갖 부족이 덤벼들었다.
‘로마 멸망의 서곡’이라는 아드리아노플 전투. 동로마지역을 통치하는 공동 황제 발렌스는 지원군을 기다리자는 조언을 묵살하고 성급하게 나섰다.* 2만 5,000 여 병력이** 동틀 무렵 전장을 향해 떠났다. 보병 3분의 2, 나머지는 기병으로 편성된 로마군은 7시간을 급속행군해 아드리아노플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두 시 무렵. 로마군은 쉴 틈도 없이 전투를 벌였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으나 서고트족의 기만 전술과 유인술에 말려들었던 탓이다.
높은 지형에 마차를 원형으로 둘러싼 서고트 지역을 향해 로마군을 기병대를 좌우 양쪽으로 출격시켰다. 중앙은 중장보병대가 맡아 진군하던 순간, 보급품을 구하러 진지를 비웠던 서고트 기병대가 나타났다. 높은 지형에서 달려나가는 서고트 기병의 가속도를 로마 기병들은 당할 수 없었다.*** 기병들이 흩어진 뒤부터 전투의 양상이 학살로 변했다. 중앙에 고립된 로마군 보병대는 서고트족 기병대에 양쪽으로 포위당하고 원형 진지에서 고트족 보병이 쏟아져 나왔다.
운신할 공간도 없이 포위 당한 로마군은 일방적으로 당했다. 황제 발렌스도 여기서 죽었다. 살아남은 로마군은 날이 어두워지고야 전장을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로마군 사상 최대의 참패였다. 적어도 3분의 2가 속절없이 당했다. 퇴각한 일부가 진지로 후퇴해 농성작전으로 서고트족의 추가 진격을 막아냈으나 로마 전역은 충격에 빠졌다. 더욱 큰 문제는 한 번 지면 두 번 이겨 상대를 굴복시켰던 이전의 로마군과 달리 응징할 힘이 없었다는 점. 로마는 이때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다.
로마 제국에게 건국 이래 최악의 패배를 안긴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근인(近因)은 세금과 차별. 원래 고틀란트(오늘날 스웨덴) 지역에 살다가 중부 유럽에 내려왔던 고트족은 훈족의 침입으로 근거지를 잃자 로마에 애걸복걸해 삶의 터전을 얻었다. 로마 황제 발렌스는 서고트족의 무장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트라기야 지방 정착을 허용했으나 고트족은 무장을 결코 풀지 않았다. 부패한 로마 관리들을 매수해 무장을 유지했다.
유목민에게는 생명과 같았던 무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서고트족은 아내와 딸을 로마의 관리들에게 바쳤다. 러시아 태생의 비잔티움 전문 역사학자인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1902~1986)의 비잔틴 제국사의 한 대목. ‘고트족에게 매수 당한 로마 관리 중에는 야만족 미녀에 빠진 자도 있었고 값진 의상이나 장식이 있는 담요 같은 선물에 매수 당한 자도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저택을 노예로 채우거나 농장을 가축으로 가득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뒀다.(258쪽)’
뇌물보다 더한 착취도 일어났다. 트라기야 지방의 로마 최고위직 관리들은 서고트족이 농사에 서툴다는 점을 악용했다. 경작지는 내주되 경작 방법은 전혀 알려주지 않아 아사 위기에 직면한 서고트족에게 비싸게 곡물을 팔아 거액을 챙겼다. 돈으로 바꿀 수 있는 패물과 직물, 가구를 처분한 서고트족은 선정(善政)을 갈구했으나 부패한 로마 관리들은 오히려 세금을 올렸다. 결국 악정과 지방관리들의 부패는 봉기를 불렀다.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패배 이후 끊임없이 ‘야만족의 침입’에 시달리던 서로마는 476년 멸망하고 말았다.
물론 서고트족에게 참패를 당하기 전부터 전조는 있었다. ‘법의 정신’의 저자로 유명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몽테스키외의 1734년 저술 ‘로마의 성공, 로마제국의 실패’에 따르면 로마는 강력한 적수인 페르시아를 감당하기도 버거운 판에 ‘파국적인 이중(二重) 전선’의 형성을 방치해 몰락을 자초했다. 북쪽 국경이 흔들린 것이다. 색슨족과 에이레인들의 로마령 브리타니아(영국) 침공, 라인 강변과 네케르 강변에서의 알레라미족(게르만의 일족)과 격렬한 전투, 도나우 강 유역에서 사르마트족·콰디족과 격전들이 로마제국을 괴롭혔다. 몽테스키외는 북쪽 국경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 같은 충돌이 대위기의 전조 증세로 봤다.
아드리아노플의 전투 결과는 서고트족에 자치권을 안긴 데 그치지 않고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낳았다. 마침 훈족의 습격에 한파까지 겹친 상황. 로마군이 예전의 로마군이 아니라고 생각한 게르만족은 떼지어 얼어붙은 라인강을 건넜다. 게르만으로 득실거리게 된 서로마제국은 결국 멸망했다. 전투 하나가 고대를 무너뜨리고 중세의 문을 연 셈이다. 종교도 영향을 받았다. 공동황제 발렌스가 다스리던 동로마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아리우스파*****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발렌스는 아리우스파를 지지한 마지막 로마 황제였기 때문이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를 통해 확인된 로마의 쇠약은 정치와 경제 질서의 변화를 낳았다. 고트족은 이 전투 이후에도 수차례 로마와 충돌한 끝에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로마제국은 ‘야만족’들과 협정을 맺어 제국 내에서의 자치권을 내줬다. 세금도 면제하고 높은 급료를 주고 로마제국의 동맹자로 끌어들었다. 게르만족의 병력을 끌어들인 로마제국의 군사력은 겉으로는 강해지는 것처럼 보였으나 속으로는 곪았다.
무엇보다 야만족에 대한 지출 급증으로 재정이 나빠졌다. 주민들의 생활 역시 더욱 찌들어갔다. 경제적 파산과 무거운 채무,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자영 농민들은 △야만족 무리로 피신하거나 △자유를 팔고 대토지 소유자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5세기 초반 제국 전역에서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묶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자유를 포기하고 예속적 지위를 자처한 몰락 자영농들은 시간이 흐르며 농노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투 하나가 세상을 변화시킨 셈이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세계적인 거시경제학자인 글렌 허버드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는 역저 ‘강대국의 경제학’에서 로마 몰락의 원인을 경제에서 찾는다. 제국이 확대되며 씀씀이가 늘어난 상황에서 역대 황제들이 통화가치를 떨어트려 인플레이션이라는 감춰진 세금을 걷고 중앙집권적 명령체계를 강화하며 재산권과 민주주의도 약해져 결국 멸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내부에서 자초한 경제난국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얘기다. 과연 어떤 견해가 맞을까.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해 보이는 사실은 하나 있다. 후기로 갈수록 로마의 지도층은 병역을 기피하고 외국인에게 안보를 맡겼다. 관리들은 부패하고 군대는 지쳐갔다. 국가가 쇠망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공동황제 발렌스가 성급하게 나선 이유는 두 가지. 첫째 고트족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봤다. 둘째로 전공을 독차지해 인기를 만회하고 싶었다. 페르시아와 전쟁을 위해 안티오크(안디옥)에 주둔하던 발렌스가 고트족의 봉기 소식을 듣고 귀국해 콘스탄티노플에 머문 게 열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노골적으로 발렌스를 비난했다. 우유부단할 뿐 아니라 서고트족을 끌어들여 재난을 자초한 장본인이라는 여겼기 때문이다.
** 당시 로마군 병력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5만명에서 4만명, 1만5,000명까지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2만5,000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군 병력이 많지 않았다는 견해가 우세해지는 분위기다. 서고트족 병력도 마찬가지다. 6만명에서 5만명, 1만 5,000여명이라는 설이 있다. 로마군보다 1만명에서 5,000명 정도 많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 서고트족 기병대가 로마군을 압도한 이유로 기수의 발을 지탱해주는 등자(stirrups) 덕분이라는 견해가 있다. 서고트족에 흡수된 스키타이족 기병들이 등자를 사용해 로마군을 압도했다는 주장이나 분명하지 않다. 최근에는 양쪽 기병대가 동일한 조건으로, 즉 등자 없이 싸웠다는 견해가 우세한 편이다. 서양에 등자가 전해진 시기는 6세기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 고전인 ‘법의 정신’보다 14년 앞서 출간된 이 책은 몽테스키외가 66년 평생 동안 저술한 두 권 중 하나다. ‘법의 정신’도 로마의 공화정을 주요한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고전인 ‘법의 정신’의 예고편으로도 간주된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기독교의 일파. 성부와 성자, 성령이 일체라는 삼위일체설을 부인하고 단성론을 주장하며 이집트와 소아시아지방에서 세력을 넓혔으나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분류됐다. 영지주의파라고도 불리는 아리우스파는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발렌스가 전사하며 세력이 급속히 약해졌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된 것은 392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