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1971년의 개·돼지’…광주대단지 사건



1971년8월10일 오전 11시40분, 서울시 성남출장소(현 성남시청) 뒷산 공터. 궐기대회에 운집한 5만 군중이 술렁거렸다. 11시에 주민들과 만나겠다고 약속한 서울시장이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외쳤다. ‘서울시장은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외침은 다른 메아리로 돌아왔다. ‘또 속았다, 내려가자!’

흥분한 군중은 너나 할 것 없이 150m 아래 서울시 대단지 사업소로 몰려갔다. 내려가던 일부 군중은 서울시 소속의 지프를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리며 개울 바닥에 처박았다. 사업소로 몰려간 군중은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요즘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성남시, 당시에는 경기도 광주면 중부면에서 발생한 이날 소요는 사회와 정치권에 충격을 안겨줬다. 박정희 정권에서 일어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민중 봉기였으니까.


서슬 퍼렇던 3공 시절,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보도하며 ‘광주대단지 난동’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법정에서도 난동이라고 불렀다. 과연 광주대단지 사건은 난동이었을까. 배경과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단순하게 난동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기본권 투쟁의 성격이 강하다. 사건의 근본 원인은 수출주도형 경제 개발의 부산물인 철거민. 수출 가격경쟁력 확보를 위한 저임금·저곡가 정책은 대규모 이농과 도시 빈민 문제를 낳았다.

경제개발에 착수하기 직전인 1960년 서울 인구는 약 245만명. 1970년에는 554만명으로 늘어났다. 서울시 주택보급률이 46%에 불과하던 시절, 무주택가구의 절반 이상이 무허가건물에 살았다. 해방 직후부터 생긴 서울시 무허가주택은 1960년 5만5,887채에서 1969년에는 26만8,805채로 늘어났다. 서울시가 도시 미관과 위생을 위해 무허가주택, 속칭 판자촌 강제 철거에 나섰지만 자고 나면 판자촌이 생겼다. 철거반을 동원해 허름한 판자촌을 부수면 또 다시 판자촌이 들어섰다.

철거와 잠입, 추방과 재진입의 끊임없는 악순환 속에 서울시는 대책 없는 철거만으로는 판자촌 정리가 어렵다는 판단 아래 세 가지 정책 대안을 내놓았다. 무허가 주택 양성화와 서민 아파트 건립, 신도시 개발 중에서 첫째 대안은 일찌감치 접었다. 판자집은 개량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허술했다. 결국 두 가지만 남은 가운데 서민아파트 건립을 추진했으나 이마저 물 건너갔다. 적지 않게 들던 예산이 부담이던 차에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난 탓이다.

서울시는 신도시 건설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갔다. 무엇보다 예산이 많이 들지 않는 이른바 ‘경영 사업’ 방식이 특장점으로 꼽혔다. 경영 사업 방식이란 예산을 투입하는 게 아니라 토지를 싸게 사서 입주민들에게 비싸게 팔아 개발비용을 충당하는 방식. 택지와 기반시설을 건설하지 않고 먼저 입주부터 시키는 방식이었다. 집을 짓는데 상식인 ‘선 개발, 후 입주’가 아니라 ‘선 입주, 후 개발’ 방식의 부작용 가능성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이 의문을 표시하자 김현옥 서울시장은 ‘사람들이란 원래 10만명만 모아 놓으면 저희들끼리 알아서 살아갈 수 있다’며 강행했다고 전해진다.

서울시는 토지가격이 싸고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 350만평을 골랐다. 서울시는 1969년부터 청계천과 용산, 영등포 일대의 판자촌 주민 2만1,372가구를 강제 이주시켰다. 철거민들의 저항은 크지 않았다. 토지 분양과 일자리 제공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에게 올라간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사건 당시 광주대단지의 인구는 13만5,214명. 인구로만 보면 순식간에 웬만한 도시 하나가 생긴 셈이지만 생활 여건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토지 정리도 채 끝나지 않는 마당에 도로와 공공 상하수도 보급도 20%를 밑돌았다. 약속했던 일자리도 제공되지 않았다. 철거민들은 악취 속 허허벌판에 그냥 내버려졌다. 서울과 오가는 교통편도 하루에 버스 6편 뿐이었다.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에 살 때는 날품을 팔아서라도 그날 그날 먹고 살 수 있었지만 당장 끼니 해결조차 어려웠다. 인근 닭장의 사료를 훔쳐 가족들이 죽을 끓여 먹고 쓰레기 통을 뒤지는 사람도 많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개발 정보를 미리 파악한 투기꾼들이 판쳤다는 사실. 먹고 살기 어려워진 철거민들은 20평짜리 토지 분양권을 팔고 서울의 무허가촌으로 되돌아갔다. 일부 철거민이 떠난 자리에는 내 집을 싼 값으로 지으려는 일반 수요자(전입자)들이 몰려들었다. 마침 1971년은 선거의 해. 4월27일 7대 대통령 선거와 5월25일 8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과정에서 장밋빛 공약들이 쏟아졌다.

공화당 소속 차지철 후보는 토지 무상 불하와 세금 면제, 대형 공장 유치 등으로 광주대단지를 지상낙원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밀었다. 감언이설에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정부도 투기 열풍을 거들었다. 어제는 공업단지 기공식, 오늘은 상수도 통수식, 내일은 도로 준공식이 열리는 식이었다. 중심가 일부는 종로와 맞먹는 평당 20만원에 이르렀다는 신문 기사까지 나왔다.

과열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얼어붙었다. 서울시는 분양권 소지자들과 토지 매매 계약을 서둘렀다. 각종 건설공사로 재정난에 빠져 있던 서울시는 평당 약 2,000원으로 책정한 택지를 처분하지 않으면 신규투자가 전면 중단될 위기를 맞고 있던 상황. 더욱이 서울시는 입주권을 사서 들어온 전입자들에게는 평당 8,000원에서 1만6,000원씩 토지 가격을 매겼다. 계약과 동시에 땅값을 완불하라는 조항까지 곁들었다.

서울시장 명의의 토지대금 납부고지서가 발부된 게 7월 13~14일. 고지서에는 7월 말까지 ‘납부하지 않을 경우 6개월 이하 징역이나 3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는 경고 문구까지 붙어 있었다. 호구지책도 마련하지 못하는 주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분노와 실의에 빠진 주민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불하가격 시정 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7월17일 한 교회에 모인 100여명 유지들은 단지를 11개 구역으로 나눠 대표 1명씩을 선출해 이틀 뒤 다시 만나 대책을 협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약속한 7월19일 모인 인원은 11명이 아니라 2,000명이 넘었다. 그만큼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던 것이다. 대책위는 4개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①철거민·전입자 할 것 없이 단지 내 모든 대지 가격을 평당 2,000원 이하로 할 것 ②대지 불하대금을 10년 분할상환토록 할 것 ③향후 5년간 각종 세금을 면제할 것 ④영세민 취로장 알선과 구호대책을 세울 것.


대책위는 23일 오후 주민합동회의를 열어 요구조건을 추인받아 서울시와 경기도에 전달하며 월말까지 긍정적 회신이 없을 경우 실력행사에 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울시는 여기에 대해 28일까지 아무런 회신도 보내지 않았다. 대책위는 당국의 반응이 없자 투쟁위 체제로 전환하며 집집마다 다음과 같은 구호를 담은 포스터와 삐라를 뿌렸다. ‘백원에 뺏은 땅, 만원에 폭리 말라’, ‘살인적 불하가격 결사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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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하가격은 정말 살인적이었고 서울시는 폭리를 취했을까. 그랬다. 서울시가 경기도 광주면의 토지 소유자들에게 지불한 토지 가격은 평당 평균 250원을 넘지 않았다. 지주들은 지주들대로 뿔났다. 헐 값에 사들인데다 돈이 아니라 다른 토지를 요구하는 지주에게 서울시는 가치와 환금성이 떨어지는 산비탈 부근의 땅을 대신 내주는 횡포를 부렸다.

원래부터 살던 주민에서 철거민, 전입자 등 모든 주민이 격앙된 가운데 이번에는 경기도가 건물 취득세를 내라는 고지를 발부했다. 당초 면제하기로 약속됐던 취득세 고지서는 주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서울시와 당국의 성의 있는 답변을 기다리던 투쟁위원회는 요구사항에 대한 당국의 회신 대신 날라든 세금 납부 고지서에 조롱 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결국 긴급 소집된 투쟁위는 8월10일 주민 궐기대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은 현지 공무원들은 서울시 본청에 ‘현지에서 해결 불가능한 긴급 사태 발생’이라는 급전을 보냈다. 서울시는 최종완 부시장을 급히 내려보냈다. 8월9일 밤 8시 넘어 열린 투쟁위와 최 부시장과 면담을 평행선을 달렸다. 최 부시장은 요구를 듣다 ‘누가 당신더러 이 곳에 와서 살라고 했소? 여기서 살지 않으면 될 것 아니요”라고 말해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다. 밤 11시를 넘도록 계속된 담판은 결렬되고 말았다. 합의 사항은 오직 하나. ‘내일(10일) 오전 11시까지 양택식 서울시장이 와서 직접 교섭한다’는 것 뿐이었다.

부시장이 떠난 뒤 마이크를 단 투쟁위 자동차가 대단지를 돌면서 소식을 알렸다. ‘시장이 내일 11시에 오기로 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해 우리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자’. 이윽고 8월10일 아침, 부슬비가 내리는데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투쟁위가 예상했던 1만명보다 훨씬 많은 5만명이 이른 시간부터 모여 시장을 기다렸다. 약속 시간이 넘어도 양 시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흥분할 대로 흥분한 군중들은 출장소로 몰려갔다.

성난 군중들은 이곳 저곳으로 몰려다니며 공공건물과 기물을 부쉈다. 차량 22대도 불탔다. 일부 군중들은 ‘청와대로 가겠다’며 버스를 탈취해 단지 외곽으로 떠났다. 공무원 92명은 도주하고 성남지서 경찰관 30여명도 사라졌다. 경찰들이 증원돼 최루탄을 쏘며 저지했으나 군중이 워낙 많았다. 대치는 여섯 시간 동안 이어졌다. 오후 5시20분께, 서울시가 모든 조건을 수용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군중은 흩어졌다.

단 여섯 시간 만에 끝난 광주대단지 사건은 한국 사회에 무수한 영향을 남겼다. 정권은 최초의 민중 봉기를 심각하게 여겼다. 기밀이 해제된 청와대 문건에 따르면 당시 박 대통령은 주동자를 색출해 엄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한 22명이 재판 받았으나 전직 장관급 공무원을 지낸 목사 등 투쟁위의 주요 인사들은 다치지 않았다. 대신 성남지역에는 어느 곳보다 많은 경찰이 상주하며 주민들을 끊임없이 감시했다. 광주대단지 사건 3년 뒤에 성남시 숭신여중에서 국어교사로 부임했던 소설가 윤흥길은 1977년 이 사건과 경찰의 감시를 소재로 삼아 베스트셀러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를 지었다.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수습책에 나선 정부는 대단지 사업을 서울시에서 경기도로 이전하고 광주대단지를 성남시로 승격시켰다. 공장 유치와 학교 유치, 상하수도 같은 각종 생활 시설도 뒤늦게 들어섰다. 오늘날 성남시의 모습이 이때 형성됐다. 짧은 시간의 봉기였지만 그 전후에 담긴 고통은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이런 괴담도 돌았다. ‘남편은 식량을 구하러 떠난 가운데 열흘을 굶은 임산부가 출산 후에 정신분열 증세에 빠져 신생아를 삶았다.’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였으나 성남을 넘어 그 시대를 살았던 뇌리 속에는 고통의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운동권에도 이 사건은 영향을 미쳤다. 제정구와 손학규, 김문수 등 서울대 출신 운동권들이 광주대단지 사건을 계기로 도시빈민 문제에 뛰어들었다. 두레공동체 김진홍 목사도 비슷한 경우다. 헌법재판소에서 해산 결정을 받은 통합진보당의 중추였던 경기동부연합도 광주대단지 사건과 맥이 닿는다. 고립과 허기 속에 어린 눈으로 광주대단지 사건을 지켜보고 성남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받으며 청소년기를 지낸 뒤 대학 운동권에서 만난 성남 출신들은 경기동부연합으로 뭉쳤다.

광주대단지 사건 발생 9년 뒤 또 다른 광주에서는 비극이 일어났다. 수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일까. 전라남도 광주의 집단기억은 광주항쟁이라는 역사의 기억으로 남았다. 경기도 광주의 집단기억은 왜곡되고 매도 당하며 흩어질 판이다.*** 단지 철거민이라는 이유로, 못 산다는 이유로 국가가 국민들을 고립시켰던 광주대단지 사건의 시제는 과거형일까. 세월은 고약하다. 분당이 성남과 다르고 싶고 남을 차별하는 의식이 개개인으로 분화, 변질되고 있으니까. 45년 전 광주가 묻는다. 국민을 개·돼지로 여기는 공직자가 이젠 사라졌나. 담 하나를 두고 임대아파트에 살면 학급 배정까지 갈리는 사회, 아이들까지 계층을 나누는 우리는 건강한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1970년4월8일, 준공 4개월 밖에 안된 마포구 창천동의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사건. 입주 예정 30가구 가운데 먼저 들어온 15가구 주민 41명이 중경상을 입고 33명이 깔려 죽었다. 군림하는 관청의 ‘불도저식 행정과 부실공사’ 탓이다. 사고 발생 나흘 전, 금이 갔다는 주민들의 신고도 무시됐다. 와우아파트는 설계와 시공·감리까지 부실과 총체적 부패 그 자체였다. 쌀 한 가마니에 5,220원 하던 시절, 시공비가 평당 1만원에도 못 미쳤다. 당초 공사비는 평당 2만원 꼴이었지만 경험 없는 업체가 계약을 따내 커미션만 챙기고 시공은 무허가 업체에 맡기는 과정에서 시공비가 새나갈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공사비는 부실시공을 불렀다. 기둥 하나에 70개씩 들어가야 할 철근은 불과 5개만 쓰였다. 건설현장의 금기사항인 한겨울의 콘트리트 시공은 배합마저 엉망이었다. 시멘트 대신 모래가 대부분인데다 한 지게에 30~40원씩 줘야 하는 물을 아낀다고 제대로 섞지도 않았다. 자재와 자금 부족에도 와우지구 아파트단지(15개동)가 착공 6개월 만에 완공됐다는 ‘실적’은 부실시공을 기획하고 자재를 빼돌린 공무원들에게 돌아갔으나 국제적 망신을 샀다. 붕괴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서울에서 아시아개발은행(ADB) 총회가 열렸기 때문. ‘한국의 발전상을 알린다’는 생각으로 유치한 국제대회에서 치부만 드러낸 꼴이 됐다.

** 다른 내용을 담은 자료도 있다. 양택식 시장이 약속보다 10분 앞서 현장에 도착했으며 많은 군중이 흥분할 것을 우려한 투쟁위가 양 시장을 제 3의 장소로 옮겨 협상을 시작했다는 것. 협상이 타결되어가던 도중에 군중들의 ‘난동이 시작돼 시장을 자리를 피했다’는 것이다.(손정목 당시 서울시 기획관리관, ‘도시 50년사’ 중 ‘광주대단지 사건’)

*** 광주대단지 사건의 재조명하려는 성남시 의회는 진상 규명과 피해자의 명예회복이라는 애초 방침과 달리 실태 파악 후 피해 지원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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