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진료비를 낼 때 1차로 본인부담률 만큼만 낸다. 그래도 본인부담액이 소득수준별 연간 상한액을 넘어서면 초과분을 전액 건보 재정에서 지원한다. 본인부담 상한제라는 2차 완충장치다. 상한제 덕택에 지난해 진료를 받은 52만여명이 9,900억원의 본인부담을 덜었다.
건보 재원은 보험료와 세금이다. 그래서 가입자 간 연대성과 부담·혜택의 형평성은 제도 유지에 필수 요소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본인부담 상한액을 연간 120만원, 150만원, 200만원 등으로 차등하는 기준이 직장·지역가입자별 보험료 수준(하위 10%, 30%, 50% 이하 등)에 따라 상대평가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건보료 부과체계와 소득파악률이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그 결과 월 보험료가 3만원인 직장가입자의 본인부담 상한액은 120만원이지만 지역가입자는 200만원으로 큰 차이가 난다.
건보료가 소득중심의 단일 부과체계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차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월 소득이 28만원만 있어도 건보료를 물리면서도 연 2,000만원 이하의 주택임대소득에는 세금도, 건보료도 물리지 않는다. 연 4,000만원(월 333만여원)이 넘는 공무원·군인·사학연금을 받는 은퇴자는 직장가입자인 배우자나 자녀의 피부양자가 돼 건보료를 한 푼도 안 낼 수 있다. 대부분의 직장가입자는 2,000만원 이하의 금융소득에는 건보료를 안 낸다.
그런데도 정부는 얼마 전 연간 2,000만원 이하의 주택임대소득에 대한 분리과세 도입을 2년 더 늦추겠다고 발표했다. 세금도 안 매기는데 건보료를 물리겠다고 하면 난리가 날 게 뻔하다. 전문가들과 야당은 건보료 부과체계를 소득중심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왔지만 정부가 고춧가루를 뿌린 셈이다. 정부안을 언제까지 내놓겠다는 언급조차 없다.
정부는 보험료가 올라가는 이들의 반발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본질은 “최고의 악성 민원인은 공무원과 은퇴공무원”이라는 보건복지부 한 공무원의 말에 함축돼 있다. 연금소득 등 때문에 피부양자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는 현재와 미래의 공무원들이 부과체계 개편의 최대 걸림돌이라는 얘기다.
연금 전문가들은 국민연금 기금이 지속 가능하려면 보험료율을 12~16%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월 200만원을 좀 넘는 평균소득자의 총 연금액이 총 보험료의 1.9배(수익비)에서 1.4~1배로 떨어진다. 400만원대 중반 이상의 고소득자라면 수익비가 1.4배에서 0.7배 수준까지 하락한다. 저소득층은 낸 것보다 많게, 고소득층은 적게 타야 지속가능하고 사회보험 원리에 맞는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미국 국민연금(OASDI)의 수익비도 모든 가입자에게 1 이하라고 한다. 낸 것보다 훨씬 많이 가져가는 기존 연금 수급자 때문이다. 보험료를 늦게 올릴수록 미래 가입자들의 불이익은 커지고 연금의 지속가능성은 떨어진다.
정부는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기는커녕 발목을 잡고 있다. 얼마 전에는 연 2,000만원 이하의 주택임대소득에 대한 분리과세 도입을 2년 더 늦추겠다고 발표했다. 세금도 안 매기는데 건보료를 물리겠다고 하면 난리가 날 게 뻔하다. 소득중심의 부과체계로 가려면 현재 건보료를 물리지 않는 2,000만원 이하의 금융소득, 세금조차 안 물리는 주택임대소득 등에 세금과 보험료를 물리는 게 긴요하다.
현행 건보 부과체계는 사회보험 원리와 한참 동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기득권층의 반발에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다. 기득권자 중에는 공무원과 은퇴공무원의 비중도 상당하다.
공무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못할망정 사회보험의 연대성과 형평성 원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정치권도 공공기관 간부들에게는 임금피크제를 강요하면서도 “우리는 정년이 법으로 보장돼 있다”며 비껴가는 공무원의 행태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더 나가 공무원·군인·사학연금은 개혁을 미룰수록 미래 세대와 우리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미친다. 정부와 정치권은 기득권 눈치 보기와 폭탄 돌리기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임웅재 논설위원 겸 노동복지선임기자 jaeli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