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가질 수 없는 魚

[식담객 신씨의 밥상] 스물네번째 이야기 ‘민어’



“이렇게 뵙게 돼서 참 좋습니다. 다음에는 편하게 소주 한 잔 어떠십니까?”

몇 해 전 여름, 고객사와 점심미팅 자리.


양쪽 모두 직위가 높은 분들이 참석하셨는데, 서로 말이 잘 통하고 인간적으로도 호감을 느끼신 듯합니다.

우리 회사 어른께서 못내 아쉬우셨는지 다음 자리를 제안하십니다.

“좋습니다. 민어 어떠십니까? 요즘처럼 기가 허해질 때는 민어만 한 게 없죠. 제가 몇 번 가본 집이 있습니다.”

고객사 본부장님의 추천메뉴가 당기시는지, 우리 어른께서 흔쾌히 답하십니다.

“민어 저도 좋아합니다. 그럼 다음다음주 수요일 어떠십니까?”

미팅 준비하기에 아주 편한 상황입니다.

일반적일 때, 양쪽 시간을 조율하고 식당도 여러 후보 맛집을 제안해서 재가를 받습니다.

생각보다 절차가 복잡한데, 대부분이 해결된 겁니다.

회사에 복귀 후, 바로 예약을 진행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맛집이라는 호평 일색입니다.

전화를 걸어 당일 예약현황을 알아보고, 저녁 퇴근길엔 현장을 방문합니다.

소탈해 보이는 가게 풍경이 정겹습니다.

잠시 여기저기 둘러본 후 사장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께 묻습니다.

“저희가 예닐곱 명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개별 방 있으면 부탁합니다. 그런데 메뉴판에 고급 소주는 없네요?”

“원하시는 거 미리 말씀하시면 준비해 드릴게요.”

사장 아주머니께서 시원시원 친절하십니다.

“민어회 大자면, 보통 몇 명이 먹습니까?”

“서너 분 드시면 적당해요.”

大자 8만원, 민어가 처음이라 당최 감이 안 잡힙니다.

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부담스러운 정도까지는 아닌 듯합니다.

2주가 금세 지났습니다.

예정 시간보다 30분 정도 미리 도착해, 자리배치와 메뉴 순서를 확정합니다.

지난번 사장님과 다른 여자분인데 닮았습니다.

두 분이 자매인가 봅니다.

“우선 민어회 대짜로 두 접시 주십시오. 테이블마다 화요 한 병이랑 카스 두 병, 콜라 하나 사이다 하나씩 세팅해 주십시오.”

“민어만 드시기엔 조금 부족하실 텐데요, 다른 거 주문하실 수 있으면 미리 말씀해 주시면 좋아요.”

사장님의 배려가 괜스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낙지가 시가라고 쓰여있는데 얼맙니까?”

“8만원이요. 낙지 곁들여 드시고 식사 나오면 적당해요.”

잠시 후, 우리 쪽 어른과 이전의 고객사 손님들이 도착하십니다.

주로 양쪽 어른들께서 말씀을 나누시면, 아랫사람들은 방청객 모드로 갑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적당한 소리로 웃습니다.

가끔 윗분들이 질문이나 부연설명을 원하시면, 토크쇼 보조진행자처럼 간결하고 정겹게 답변합니다.

처음 먹어보는 민어는 맛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내가 구분할 줄 아는 회는 두 종류뿐입니다.

참치 아니면 다른 회.

맛이 옅고 질감이 살짝 차집니다.

20회 넘게 씹으니 담백함이 배어 나오는데, 높은 어른들 모신 자리에서 ‘맛의 달인’ 놀이할 여유는 없습니다.

민어보다는 곁들여 주신 부레와 껍질에 더 끌립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회 접시에 한국화 같은 여백이 드리워집니다.

“신 과장, 다른 음식도 주문했나?”

“네, 낙지 곧 나올 겁니다.”

“그래, 잘했네. 우리 전도 좀 시킵시다.”

어른께서 메뉴판에 없는 전을 말씀하십니다.

예상 밖 변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에이, 전이 비싸 봤자 얼마나 하겠어?’

신선한 낙지가 흥을 돋웁니다.

달걀 옷을 입혀 부친 민어 전도 담백하니 맛깔스럽습니다.

보통 남도음식은 액젓 중심의 양념을 많이 써서 향이 강한데, 이곳 음식은 지나치지 않아 좋습니다.

좋은 음식은 즐거운 이야기와 술잔을 이끌기 마련입니다.

흥이 무르익을 무렵, 마지막으로 공깃밥과 탕이 나옵니다.

1인당 조그만 그릇에 나눠 담아주셨는데, 곰탕처럼 진합니다.

맛깔스러운 음식과 흥겨운 이야기가 어우러진 괜찮은 자리였습니다.


사실 어른들 모신 자리에선,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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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이 없도록 하게 하려면, 항상 긴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음식이 좋았다고 느낀 걸 보면, 이 식당은 맛집이 맞습니다.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는 계산대로 향합니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여기 얼만가요?”

“네, 101만 원 나왔네요.”

“네. 네?!”

어른들께서 작별인사를 나누고 차에 오르십니다.

“신 과장, 오늘 애썼어.”

어른께서 해주신 칭찬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꾸 계산서 금액이 아른거립니다.

아무리 숫자와 담쌓고 살아온 문과 출신이라지만, 이 계산은 잘못됐다고 직감할 수 있습니다.

윗분들이 모두 가시자 다시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저희 계산서 상세 내역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아, 어련히 잘 알아서 해드렸을까 봐 그런대요?”

사장님의 핀잔 섞인 너스레가 곱게 들리지 않습니다.

“민어 8만 원 짜리 대짜 네 개, 낙지 8만 원 두 개, 민어전 8만 원 두 접시에...”

‘젠장, 전이 8만 원라니!’

“식사 1만 원씩 여섯 개...”

‘와, 그렇게 먹었는데 서비스도 아니고 1만 원씩...’

“맥주랑 음료수랑...”

“그래도 80만 원이 안 되는데요.”

“가만 계셔봐, 화요 드셨잖아요.”

“그거 병당 얼만데요?”

“있어보자, 그게... 야, 여기 화요 얼마씩 받냐?”

‘뭐야? 가격도 안 정해놓고 정산을 한 거야?’

종이를 얻어 셈을 해봅니다.

- 민어회 8만 원 X 4 = 32

- 낙지 8만 원 X 2 = 16

- 민어전 8만 원 X 2 = 16

- 탕식사 1만 원 X 6 = 6

- 맥주, 음료 = 10(근사치)

-

대략 80

“화요가 3만5,000원씩이네.”

당황스럽습니다.

알코올 함량 22도짜리 화요는 대개 2만5,000원을 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가만, 계산이 안 맞습니다.

“사장님, 그렇게 다해도 94만 원인데요.”

사장님이 살짝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능청스러움을 되찾습니다.

“아이고 화요 네 병이네, 여섯 병 드신 줄 알았어. 내가 가끔 이런다니까.”

사람은 얼뜨기 취급당할 때 자존감에 상처를 받습니다.

마시지 않은 화요 두 병 가격 7만 원은 실수라고 여기기엔 가볍지 않은 금액입니다.

무엇보다 가격도 안 정한 술을 총액에 후려치고, 내역을 묻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뻔뻔함에 실망스러웠습니다.

카드결제를 취소하고 다시 결제해 나가는데, 뒤통수가 따끔거립니다.

서비스는 고사하고 눈퉁이를 날려놓고, 덤으로 눈치까지 줍니다.

이제 민어는 안 먹겠다고 다짐합니다.

첫 만남에 상처가 깊습니다.

솔직히 눈퉁이 바가지 여부를 떠나, 가격이 너무 비쌉니다.

공식행사 없이는 맛볼 수 없습니다.

뱅크가 부른 ‘가질 수 없는 너’의 가사가 스쳐 흐릅니다.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론 가질 수 없는 사랑이 있어~”

가질 수 없는 너, 아니 ‘가질 수 없는 魚’ 민어입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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