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기업과 조직이 ‘혁신’을 외치지만 막상 혁신에 성공한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혁신은 넘기 힘든 벽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혁신은 의외로 사소한 발견과 통찰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B급 혁신’으로 얼마든지 큰 혁신을 이룰 수 있다고 조언하는 김경수 SK플래닛 HCI(Human Centered Innovation)팀 매니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최 부장: 김 대리! 좀 혁신적인 아이템 없어? 큰 거 한방 터트려야지!
김 대리: 그게 저…. (맨날 혁신적인 것만 내놔라? 누군 내놓을 줄 몰라서 안 내놓나?)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할 만한 상황이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위 대화의 주인공이었을 수도 있다. 최 부장과 김 대리가 혁신(또는 혁신적인 비즈니스 아이템)에 대해 취하는 자세를 잘 들여다보자.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 다수가 이런 문제 속에 파묻혀 있다. 혁신을 위한 우리의 시도와 노력이 늘 실패로 돌아가는 이유를 하나씩 파헤쳐 보자.
<혁신이 어렵고 늘 실패하는 이유>
① 혁신 공포증(Innovation Phobia)
혁신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혁신은 가죽을 벗기는 아픔을 감수하는 것이다.” (서OO H사 사장)
“회사의 모든 구성원들이 뼈를 깎는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 (정OO I사 사장)
”혁신에는 고통이 수반될 수 밖에 없다. (안OO 도지사)
“혁신을 멈춘다는 것은 곧 사망을 뜻한다. (삼성&도요타 창조경영 中)
많은 사람들, 특히 최고경영진 레벨에서 혁신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다소 격해 보이는 뜻풀이와 함께 혁신의 당위성이나 절실함을 심어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오죽했으면 이렇게까지 혁신의 중요성과 실천을 강조할까 싶다. 그만큼 혁신이라는 것이 고통을 감수해야 하며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새삼스럽게 혁신의 뜻풀이를 알아보자는 의도는 아니다. 조직의 리더들로부터 이처럼 혁신이 고통스럽고 어렵다는 메시지가 강조되다 보니 구성원들이 혁신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접근방법마저도 어렵고 복잡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 않나 싶다. 자칫 지레 겁먹고 혁신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의 선입관이 작용하여 혁신은 다가갈 수 없는 요원한 것이 되어버리면 안될 것이다.
한편 기술, 자본, 조직이 없으면 혁신을 위한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혁신을 실현하기 위해 첨단기술이나 많은 자본이 있다면 그것들이 없는 것보다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혁신을 위한 별도의 조직이 구성된다면 추진력에 큰 힘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말 그대로 도움이 될 뿐이지 혁신 자체를 이끌어내는 근본적인 해답을 주지는 못한다. 기술, 자본, 조직은 유사한 기능의 대체재를 활용하거나 외부 소싱을 통해 얼마든지 해결 가능한 요소들이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개발 능력이 없다거나 자본이나 조직이 없다는 이유로 그저 혁신이 희망사항으로만 머무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에게 정작 중요하면서도 꼭 필요한 요소는 혁신을 위한 단서(Clue) 또는 아이디어이다. 이는 스스로 발견하고 만들어내야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설사 기술력이나 자본력을 동원하여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실제 사용자의 니즈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결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이다.
② 한방 증후군(One-shot Syndrome)
2013년 6월 20일. 국민타자 이승엽 선수가 개인 통산 352홈런을 쳐서 한국 프로야구 개인통산 최다홈런 신기록을 세운 날이다. 엄청난 가치를 지닌 홈런볼을 잡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커다란 잠자리채를 들고 있던 진풍경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4일 전에 있었던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홈런 하나만 추가하면 대기록 달성을 눈앞에 둔 6월 16일. 이승엽 선수는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라이언킹이라는 애칭에 어울리지 않게 좀처럼 보기 어려운 4연타석 삼진을 당하고 만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야구에서 타자가 홈런 한방을 치기 위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면 이승엽 선수의 사례에서처럼 오히려 삼진아웃이 되기 쉽다. 골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몸에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스윙의 헤드 스피드가 느려져 비거리에서 손해를 보게 된다.
혁신의 상징으로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이나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을 꼽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들의 사례로부터 교훈을 찾아 자신의 혁신 추구에 반영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우리가 혁신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음부터 스마트폰을 개발해내거나 페이스북과 같은 서비스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우리 스스로 솔직하게 한번 생각해보자. 속칭 대박 하나 터뜨려보고자 하는 목표로 달려오고 있지 않았나 말이다. 자칫 이러한 사례들의 결과물이나 규모에만 취해 있다 보면 정작 자신의 현실과의 이격감 또는 과대 목표 설정으로 인한 조기 피로감 등으로 인해 스스로의 추진동력이 힘을 잃게 되기 쉽다. 원대한 혁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목표가 원대하다고 해서 현재 수행해야 하는 일에서의 고민이나 아이디어 발굴마저도 구름처럼 높은 레벨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폰, 페이스북, 구글 검색 서비스 등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혁신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보면 그 기저에는 일상에서 비롯된 아이디어가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혁신적인 산출물일지라도 그 혁신의 시작점은 나를 포함한 사용자들의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 평범한 일상에서 ”나는 무엇을 만들어내겠다(What)“는 성급한 관점을 일단 내려놓자. 대신 이제부터는 ”왜 사용자에게서 지금의 저런 불편함과 기대가 생길까(Why)?“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일상에서의 사용자의 불편함과 기대는 어쩌면 드러나지 않아 있거나 드러나더라도 그다지 커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가볍지만 진지한 접근을 해나간다면 혁신의 후반부에서는 나름 세상에 작지 않은, 좋은 변화를 가져오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③ 사용자 맹(盲) (User-Blindness)
다음에 나열되는 사진들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정답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사진 속에는 바로 우리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혁신의 단서가 들어 있다.
사진 1과 2는 시내버스 사진이다. 평소에 보아왔던 일반 버스와는 다른 부분이 있을 것이다. 바로 버스 앞문에 달린 번호 판넬이다. 이 번호판은 사실 모 회사의 광고판이다. 하지만 이 광고판을 유심히 보면 뭔가 숨겨진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버스의 번호는 버스 정면 또는 버스 옆면에 적혀 있다. 버스 한 대가 올 때에는 그 버스의 번호를 쉽게 알 수 있지만, 출퇴근 시간에 여러 대의 버스가 나란히 꼬리를 물고 서 있을 경우 두 번째 버스부터는 번호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버스정류장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은 버스의 번호를 확인하기 위해 뒤쪽으로 걸어가야 할지, 아니면 뒤쪽 버스가 자기가 있는 쪽으로 오기를 기다려야 할지를 망설인다. 그러다가 자칫 기다리던 버스가 뒤쪽에 있었음에도 버스 번호를 인지하지 못한 탓에 버스가 떠나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여러 번 겪어봤을 만한 경험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버스 문에 번호 판넬 하나를 부착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된 것이다. 버스가 멈춘 뒤 문이 열리면 번호 판넬이 버스 정면에서 보여지도록 직각으로 부착했다. 줄지어 서 있는 버스들의 번호판을 정류장 앞쪽에서도 쉽게 알아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단순 광고판으로만 바라보면 찾아낼 수 없는 의미이지만, 버스와 버스 이용자를 둘러싼 맥락을 잘 관찰해보면 분명히 그 안에는 누군가는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것이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 있는 실마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의 입장에서 불편함을 찾아내고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도출해낼 수 있는 혁신의 가벼운 시작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이 번호 판넬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집중되는 영역이다. 광고의 목적이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번호 판넬은 광고판으로서도 톡톡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사진 3과 4는 공중화장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두루마리 휴지의 모습이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화장지 두 개? 여기에서도 쉽게 혁신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공중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화장지가 다 떨어져 있어서 당황했던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태의 책임을 고스란히 화장실 아줌마에게로 돌리기도 한다. 그래서 자구책으로 등장한 방법이 바로 화장지를 두 개 비치해놓는 것!
화장지를 두 개씩 비치함으로써 하나가 떨어지더라도 화장실 사용자가 겪을 난감한 상황을 예방해준다. 동시에 자주 화장지를 비치해야 하는 화장실 관리자의 수고도 덜어줄 수 있는 윈윈 해결책이 된다. 사실 굳이 두 개짜리 화장지 걸이가 아니더라도 화장실 안 어딘가에 여유분의 화장지를 비치해두는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여기에서 발견한 혁신의 실마리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응용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물건을 한 개만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난감해지거나 불편해지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외부 활동 중 배터리가 모두 방전돼 휴대폰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난감한 상황. 신용카드나 현금, 또는 멤버십 카드가 들어 있는 지갑을 깜박 두고 와서 결제를 못 하거나 할인 혜택을 놓치는 당황스러운 상황. 작성한 자료 파일을 내 방 컴퓨터에만 저장해두고선 회사나 학교에서 사용하지 못해 난처했던 상황. 앞서 이야기한 예비 화장지 비치 사례의 레슨에 추가적인 아이디어를 더해보면 분명히 주변에서 제법 효과적으로 적용될 상황들이 있을 것이다.
사진 5와 6은 길거리에서 쉽게 눈에 띄는 전봇대의 모습이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전봇대나 상가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각종 광고 스티커를 볼 수 있다. 허가를 받지 않고 붙여 놓은 광고 스티커도 문제이지만, 길거리 미화를 담당하는 사람에게는 여기저기 광고 스티커를 떼어내다가 실패한 흔적들이 오히려 더 속상할 일이다. 허가되지 않은 곳에 광고 스티커를 붙이는 것 자체가 불법이겠지만, 어쨌든 붙이는 자와 떼려는 자의 기싸움은 결국 거리의 미관을 해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거리의 전봇대들에는 (앞의 또 하나의 사진처럼) 왠지 낯선 울퉁불퉁한 모양의 커버가 입혀지기 시작했다. 전봇대뿐만이 아니다. 거리의 신호등 점멸장치, 벽면 등 불법 광고 스티커가 붙을 만한 곳에는 점점 이 낯선 모양의 커버가 입혀지고 있다. 광고 스티커가 잘 붙지도 않을 뿐 아니라 스티커를 붙이더라도 흔적 없이 쉽게 바로 떼어낼 수 있도록 표면을 입힌 것이다. 그 때문인지 이 울퉁불퉁한 표면의 전봇대에는 아예 스티커 자체가 거의 붙어 있지 않다.
어디에서 그 힌트를 얻었을까? 전봇대 옆에 서 있는 가로수가 눈에 들어온다. 가로수의 표면에는 스티커가 전혀 붙어 있지 않다. 까칠까칠하고 울퉁불퉁한 가로수 껍질은 전봇대의 개선된 울퉁불퉁한 표면과 흡사하다. 가로수 표면에 스티커가 잘 붙지 않는다는 걸 간파했다면 바로 여기에서 전봇대 표면 해결책의 힌트를 얻었을 수 있다.
다른 어딘가에서 힌트와 영감을 얻어 자신의 문제 해결에 적용한다는 것. 혁신은 반드시 새로워야 할 필요는 없다.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빌려와서 또 하나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바로 혁신이다.
앞에서 사진과 함께 이야기했던 사례들은 우리 일상에서 흔히 목격되는 상황들이다. 이런 상황들을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사용자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또는 알면서도 해결방법을 찾지 못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우리(상품/서비스 제공자)가 그 사람(사용자)의 입장이 아닌 나를 중심으로 상황을 바라보았거나 또는 사용자를 헤아리더라도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상품이나 서비스가 자칫 우리(제공자) 입장에서 만들어지거나 구현되고 있지 않나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일상에서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 지나치기 쉬운 상황들 속에 숨어 있는 혁신의 단서들이 무척 많다. 하지만 이런 혁신의 단서는 우리 스스로가 ‘혁신의 안경(Innoglass)’을 써야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혁신의 안경을 쓴다는 것은 ‘익숙해져 있던 불편함을 의심해보고, 한쪽의 용도를 빌려서 다른 곳에 응용해보고, 사용자의 입장에서 한번 더 고민해보는 헤아림의 자세를 지닌다’는 의미다.
<혁신을 쉽게, 지속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방법>
앞서 살펴본 사례들처럼 혁신에는 반드시 첨단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혁신을 전문으로 하는 특정 집단만이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 흐름의 큰 축을 이루는 상품은 아니더라도 주변을 잘 살펴보면 작게라도 혁신의 시작점이 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① 가볍게 시작하자
혁신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 ‘하지만 왠지 힘들고 어렵고 복잡할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특정 조직이나 정교한 프로세스가 있어야만 혁신이 가능한 것처럼 강조되는 분위기 탓이다. 혁신을 위해 이론적, 조직적 기반이 든든하다면 유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자칫 혁신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여진다면 혁신의 몸통은 너무 무거워져서 제풀에 지쳐 포기하기 십상이다. 혁신이 잘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너무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혁신을 위해 일류대학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자격증을 여러 개 보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혁신은 바로 우리들의 생활 속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울러 리더들도 ‘혁신은 쉽고 부담 없이 실천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구성원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혁신 수행의 접근법뿐 아니라 혁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
사진 7을 보자. 종이컵에 커피를 타서 마셔본 사람들은 컵 속 물이 뜨거워서 컵을 들고 있기가 곤란했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이 사진은 컵의 뜨거움이 손에 전달되지 않도록 하는 플라스틱 홀더를 보여주고 있다. 이 얼마나 쉬운 혁신인가? 이처럼 쉬운 발상의 전환이 혁신의 시작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생활 속에서 조그마한 불편함이나 부족함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해결로부터 시작해 세상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혁신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이다.
② 자구책을 유심히 관찰하자
사진 8과 9는 퀵서비스 기사의 오토바이 사진이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많은 고민이 녹아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오토바이 전면에 부착된 음식 보관통이 눈에 띈다. 솔직히 오토바이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장치이다. 퀵서비스 기사에겐 주문을 체크하고 배송지를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이 아주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여러 곳으로부터 주문을 받기 위해 스마트폰 서너 대는 기본으로 지니고 다녀야 한다. 하지만 주로 낮 시간에 도로를 활주하는 기사들에게는 두 손으로 오토바이를 운전하면서 동시에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햇빛 때문에 스마트폰 화면이 잘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비라도 내리면 젖기 십상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기사들은 오토바이 전면부에 플라스틱 박스나 락앤락 김치통을 부착하여 그 안에 스마트폰을 찍찍이를 이용해 부착하였다. 플라스틱 재질이라서 그리 무겁지도 않고, 통 안에서는 햇빛이나 비를 피하면서 여러 대의 스마트폰을 거치해 놓고 사용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퀵서비스 오토바이에는 이 특이한 용도의 음식 보관통이 마치 당연한 필수품처럼 달려 있다.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는 자구책은 바로 비닐봉지로 감싼 손잡이 커버이다. 추운 겨울에는 오토바이 타는 것 자체가 너무도 춥고 힘든 일이다. 특히 손이 무척 시리기 때문에 두꺼운 장갑이나 손잡이 커버는 필수 품목이다. 하지만 두꺼운 장갑을 끼면 스마트폰 터치가 잘 되지 않는다. 이동하면서 빨리빨리 주문을 접수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맨손으로 스마트폰을 다루어야 하고 그 때문에 맨손이나 손가락 구멍이 뚫린 장갑만을 낀 채로 손잡이를 잡아야 한다. 기사들이 이런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오토바이 손잡이 부분에 방풍을 위해 비닐봉지로 감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햇빛과 비를 막고자 하는 장치들, 손잡이를 감싼 비닐봉지, 청테이프와 찍찍이로 칭칭 동여맨 스마트폰 거치대 등을 잘 관찰하면서 퀵서비스 기사들의 어려움과 함께 왜 이러한 자구책들을 만들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자. 오토바이 회사, 스마트폰 회사, 또는 휴대폰 액세서리 회사 등 어느 누가 주인공이 될지 모르겠지만 분명 ”아하!“ 하는 혁신의 실마리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자구책은 혁신의 예고편인 것이다.
③ 사용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자
누구나 혁신을 할 수 있지만 아무 노력 없이 혁신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혁신의 실마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내 주변 모든 것들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 자세를 바꿀 필요가 있다. 관점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가장 쉬운 접근방법은 ‘내 주변 모든 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면 정말로 혁신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버스 번호 판넬과 두 개의 화장실 휴지 사례는 사용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혁신이다. 혁신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용자 사랑하기’라고도 할 수 있다. 사용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사용자의 입장이 되어보기(Be the Customer)’, 그리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사용자를 공감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용자가 뭔가 필요(Needs)를 느끼는 곳에는 늘 혁신이 잠재해 있다. 따라서 뭔가 특별한 혁신을 멀리에서 찾기보다는 ‘혁신은 (나를 포함한) 사용자 주변의 모든 것(Everything)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모든 사람, 현상 그리고 상황들을 대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껏 눈에 보이지 않던 혁신의 실마리들이 하나씩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B급 혁신’으로 ‘비급혁신(秘級革新)’을 추구하라>
요즘 세상을 살아가면서 혁신이라는 단어는 그다지 낯설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진 용어이다. 스스로 자신이 혁신가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학교 중에도 혁신학교가 있다. 기업들은 끊임없이 상품을 혁신하고, 프로세스를 혁신하고, 또 기업문화를 혁신하고자 애쓴다. 심지어 변화하기 쉽지 않고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공무원 조직도 행정혁신이나 혁신위원회 등을 이야기한다. 굳이 혁신 또는 이노베이션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매일매일 여기저기에서 혁신과 관련하여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과 기업, 광고, 언론 등을 접할 수 있다. 어쩌면 혁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마치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듯한 오늘날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앞서 정리한 ‘혁신이 어렵고 늘 실패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혁신을 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의 일상과 업무에서 꾸준히 익히고 적용해볼 필요가 있다.
군인들은 지급받은 전투복 중에서 새 것이거나 상태가 좋은 전투복을 A급으로 정해서 휴가나 외출 등 특별한 경우에만 입는다. 그리고 나머지 B급 전투복은 평상시 부담 없이 편하게 입는 용도이다. 사실상 군인들이 거의 매일 입는 전투복은 바로 이 B급 전투복이다. 혁신에 있어서도 ‘B급 혁신’의 추구가 필요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B급 전투복처럼, 혁신에 있어서도 일상에서 쉽고 부담 없이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혁신을 필자는 ‘B급 혁신’이라 부른다. 나에게 가장 쉬우면서도, 내가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혁신의 소스는 매일매일 끊이지 않고 제공되는 바로 내 주변 일상에 있다. B급 혁신이라고 해서 그 수준이나 혁신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작고 평범한 일상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B급 혁신이라고 부른다. 일상에서의 이러한 B급 혁신 활동이 자연스러워지고 익숙해지면 점차 그 영역을 자신의 업무나 관심분야로 확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성공 확률이 높은 비즈니스를 찾기 위한 지금까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제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비즈니스 혁신의 단서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용자의 행태에 기반을 두고 시장의 변화를 예상하거나 때로는 그 변화를 주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내의 지갑 속에서 미래의 소비를 예측해볼 수도 있고, 택배 기사의 락앤락 거치대를 보고 유통의 틈새시장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스마트함에 간과된 불편함을 해결한 상품과 서비스로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혁신으로서 B급 혁신의 꾸준한 실천은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비급혁신(秘級革新)’이 될 것을 확신한다.
김경수 SK플래닛 매니저는…
SK플래닛 HCI(Human Centered Innovation)팀에서 신규 비즈니스 컨셉트 개발, 사업 기회와 영역 발굴, 다양한 분야의 비즈니스 혁신 프로젝트들을 수행하고 있다. T아카데미 강의, 사내·외 HCI 방법론 강의, 창업 지원 컨설팅 등의 활동도 하고 있다. HCI팀은 신규 사업 발굴, 마케팅 전략 도출 등을 위해 사용자 인터뷰, 관찰 조사 등 리서치를 직접 수행하고 인사이트를 찾아 혁신적 비즈니스 컨셉트를 발굴하는 사내 혁신 컨설팅 조직이다. 2007년 SK텔레콤에서 조직이 만들어져 현재는 SK텔레콤의 자회사로 분사한 SK플래닛에서 11번가, 시럽, 오케이캐시백, 기프티콘 등의 전략 방향 제안을 비롯해 미국, 일본, 동남아, 인도 등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한 현지 소비자 행태 조사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