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들에 따르면 클린턴 후보는 이날 오전 뉴욕 맨해튼 ‘그라운드 제로’에서 열린 추모식 도중 수행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예정보다 일찍 자리를 떴다. 특히 일부 참석자들이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동영상에서는 차량을 기다리던 클린턴이 여성 수행원의 부축 속에 허리 높이의 기둥에 기대 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몸을 가누지 못해 두 차례 휘청거리는 모습이 목격됐다. 클린턴은 차량에 오를 때도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린 채 쓰러지듯 탑승했다.
클린턴 선거캠프의 닉 메릴 대변인은 “클린턴이 추모식 도중 더위를 먹어 딸의 아파트로 갔다”고 해명했으며 클린턴은 건강이상설이 증폭되자 2시간 후 딸 첼시의 맨해튼 아파트에서 보란 듯이 나와 “몸상태가 어떠냐”고 묻는 기자들을 향해 “아주 좋다”는 말을 연발한 뒤 차량을 타고 뉴욕주 자택으로 떠났다.
하지만 경찰 관계자와 시민들이 방송 뉴스에 “클린턴이 졸도한 것처럼 보였다”는 제보를 하며 그의 건강에 의문이 가시지 않자 주치의인 리사 바댁은 선거캠프를 통해 “클린턴이 이틀 전 폐렴에 걸렸고 오전 행사에서 더위를 먹어 탈수상태가 됐다”며 “탈수증상은 잘 치료됐으며 (폐렴에는) 항생제를 처방하고 일정을 조정해 쉬도록 권했다”고 밝혔다. 클린턴은 폐렴을 이유로 12~13일 캘리포니아 방문 일정을 취소했다.
유력 대권 후보이면서 두 명의 손주를 둔 할머니인 클린턴이 불안정한 건강상태를 공개석상에서 드러내자 미 대선 레이스에서 후보자의 건강 문제는 단숨에 최대 이슈가 됐다. 미국은 4년 중임제의 대통령제로 국정수행 기간이 최대 8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건강’은 세계 유일의 강대국인 미 대통령이 갖춰야 할 기본자질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클린턴의 건강에 수차례 의문을 제기했던 트럼프도 이날은 말을 아꼈다. 트럼프는 추모식이 끝난 후 기자들의 질문에 “자세히 알지 못한다”며 신중한 모습을 보였고 클린턴의 상태가 알려진 후에도 별다른 발언을 내놓지 않았다. 트럼프는 이달 초만 해도 “힐러리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 정신적·신체적 스태미나가 부족하다”고 줄기차게 공격했다.
미 언론과 여론은 두 후보 중 누가 당선되든 취임 기준 나이가 역대 최고령인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69세와 같거나 더 많은 만큼 이번 사건을 두 후보 모두에 상세한 건강기록을 요구하는 계기로 삼자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47세에 취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달 55세 생일을 맞으며 부쩍 늙은 모습이 비교돼 대통령 업무의 스트레스와 건강 문제가 관심을 모은 바 있고 레이건 전 대통령을 비롯해 과거 주요 대선 후보들도 선거기간 상세 건강기록을 공개해왔다.
그러나 트럼프는 지난해 12월 위장병 전문의의 소견이 담긴 4문단 길이의 짧은 건강기록을 공개한 것이 전부이고 클린턴도 지난해 7월 트럼프보다 조금 긴 두 장짜리 건강기록만 내놓았다. 이에 따라 50여일 남은 대선 레이스 과정에서 두 후보 중 한 명이 건강과 관련해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낼 경우 판세가 급격히 기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뉴욕=손철특파원 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