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이 500억달러(약 55조원) 이상의 ‘슈퍼 통화스와프’를 체결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27일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한국과 일본이 500억달러 이상의 대규모 통화스와프를 체결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양국은 지난달 서울에서 개최된 재무장관회담에서 통화스와프 재개에 전격 합의한 바 있다. 양국은 지난 2001년 처음 스와프를 체결한 후 30억달러, 100억달러 등 비교적 소규모로 늘려왔다. 한 번에 500억달러 이상 늘린 것은 2011년(530억달러) 한 번뿐이다.
대규모 통화스와프가 체결될 것이라는 관측의 가장 큰 이유는 중국 요인이다. 당초 일본은 지난해 2월 한일 스와프가 만기 소멸된 후 재개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최근 한반도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냉랭해지자 우리 측 통화스와프 재개 제의를 흔쾌히 수용했다. 한국과 ‘경제동맹’을 체결해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문제는 통화스와프 규모다. 현재 한국과 중국은 3,600억위안(약 60조원)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고 있다. 달러로 환산하면 약 540억달러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한중 통화스와프에 턱없이 모자란 100억달러 규모의 소규모 스와프를 한국에 제의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고 한국을 끌어들인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한중 통화스와프에 버금가는 500억달러 혹은 그 이상의 화끈한 액수를 부를 가능성이 높다.
日, 냉랭한 한중관계 틈타 中견제...한일 경제동맹으로 ‘신밀월’
실제 일본은 한중 통화스와프 규모를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받아들인 바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우리는 중국·일본과 통화스와프 규모 확대를 추진했다. 일본의 경우 초반에는 큰 경제적 실익이 없다며 우리와의 스와프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이 300억달러로 확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곧바로 자세를 바꿨다. 금융위기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던 당시 한국이 중국과만 스와프를 확대한다면 한중이 밀월관계를 형성해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린 조치였다. 아소 다로 당시 일본 총리(현 재무장관)는 “한중 스와프에 단돈 1달러도 부족하지 않게 한일 스와프를 체결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그해 12월 한중·한일 통화스와프가 각각 300억달러로 확대됐다. 우리 측도 대규모 통화스와프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기재부의 다른 핵심 관계자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다른 나라와의 통화스와프 규모는 클수록 좋다”며 일본과의 대규모 통화스와프에 열린 입장을 보였다.
한일 통화스와프 규모가 가장 컸던 때는 2011년으로 700억달러였다. 이전에는 130억달러 수준이었지만 유럽 재정위기 등을 감안해 한번에 570억달러를 늘렸다. 30억달러이던 양국 중앙은행 스와프가 300억달러로 270억달러 증가했고 100억달러였던 한국은행과 일본 재무성 간 스와프가 400억달러로 300억달러 늘었다. 이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전격 독도 방문으로 양국관계가 냉랭해진 가운데 차례로 만기가 돌아왔고 번번이 연장에 실패하며 지난해 2월 완전히 소멸됐다.
대규모 통화스와프는 한일 간의 신(新)밀월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치 분야에서는 일본이 위안부재단에 10억엔(약 100억원) 출연을 완료해 해빙 분위기가 짙다. 19일에는 미국 뉴욕에서 한미일 외교장관회담을 열어 북핵에 공동대응한다는 공동성명서도 발표했다. 한미일 외교장관이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은 2010년 6월 이후 처음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 경제위기 시 미국달러 혹은 각국의 화폐를 빌려주는 통화스와프를, 그것도 대규모로 체결한다면 양국은 정치·경제면에서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
나아가 양국 경제교류도 늘어날 수 있다. 양국 교역규모는 지난해 714억달러로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712억달러) 이후 6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10월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과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는 공동성명에서 한일 통화스와프 재개를 제안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대규모 스와프 체결로 양국 기업 간 교류도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대종 세종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는 대중국 교역의존도가 너무 심해 문제”라며 “한일 간에 반전된 분위기를 바탕으로 교역량이 늘면 중국 집중도도 완화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우리 금융시장에 안전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기정사실화된 미국의 12월 금리 인상 이후 금융·외환시장의 단기 혼란이 우려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국제화된 통화와의 스와프가 사실상 없는 실정이다. 중국의 3,600억위안이 있지만 위안화와 원화 교환 체계다. 위안화가 국제통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전 세계 결제시장에서 비중이 1.72%(6월 현재 국제은행간통신협회)로 세계 6위에 불과하다. 이 밖에 미국달러 교환체계인 치앙마이이니셔티브(CMIM)의 384억달러짜리가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실제 자금을 이용하려면 다수 회원국의 동의,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협의 등이 필요해 실효성이 낮다.
호주와 45억달러 규모가 있지만 역시 호주달러와 원화 교환 체계이며 아랍에미리트(UAE)·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모두 달러화가 아닌 지역통화 기반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이 미국달러를 교환하는 체계를 만들지, 일본 엔화와 원화를 교환할지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어떤 것이 됐든 모두 국제통화로 우리 외환시장 혼란기에 든든한 방파제가 될 수 있다. 엔화의 국제결제 비중은 3.46%로 달러·유로·파운드화에 이어 세계 4위이며 일본은 달러를 찍어내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과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맺고 있다.
김대종 교수는 “논란이 있지만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외환보유액은 충분하지 않은 감이 있다”며 “소규모 개방경제의 특성상 언제든 외환위기가 올 수 있으므로 일본과의 통화스와프는 규모가 크면 클수록 경제에 좋다”고 평가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올해 초 “한국의 GDP 대비 외환보유액은 2014년 현재 26.1%로 홍콩(120.4%), 대만(80.5%), 중국(33.9%), 일본(27.1%) 등에 비해 낮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만 한중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한국과 일본이 상대적으로 가까워지면서 사드 배치로 틀어진 한중관계가 더욱 냉랭해질 수 있다는 시각이 있는 반면 오히려 한중관계가 더욱 멀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중국 입장에서 한국과 완전히 척을 지기 어려우므로 그동안의 노골적인 사드 보복행위를 누그러뜨려 한일의 밀월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만기연장 협의 중인 한중 통화스와프 협상에 한일 통화스와프가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 한중은 내년 10월 만기가 도래하는 스와프 연장에 일찌감치 합의하고 규모 확대도 논의하기로 한 상황이지만 구체적인 진척은 보이지 않고 있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상대적으로 강대국에 끼여 있는 우리나라는 미일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며 “한일 대규모 스와프 체결 전 중국에 먼저 규모를 귀띔하는 기술적인 방법으로 중국의 불만도 누그러뜨리고 대규모 스와프라는 실리도 챙기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세종=이태규기자 classic@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