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2132년 세월을 무너트린 신해혁명





1911년10월10일 오후 7시,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창(武昌). 성 밖에 주둔하던 40 여명의 병사들이 무기고로 달려갔다. 공병대였다. 청나라가 애써 키운 신군(新軍·신식군대)의 제8진(鎭·사단) 산하 공병 제8영(營·대대) 병사들이 봉기했다는 소식은 인근 병영으로 퍼졌다. 제21협(協·여단) 제11표(標·연대) 병사들이 바로 따라 붙었다. 제15협 29·30표 병사들도 총을 들었다. 봉기군은 순식간에 2,000명으로 불어났다.


무기고를 지키던 병사들은 봉기군에 합류하거나 달아났다. 엄청난 병기가 쌓여 있던 무기고는 봉기군을 무장시키고도 남았다. 독일제 마우저 소총을 청이 모방 생산한 한양(漢陽)식 7.92㎜ 5연발 소총 수만 정에 마우저 소총 1만 정, 일본제 무라다 5연발 소총 1만5,000여 정과 맥심 기관총, 산포와 야포가 가득했다. 탄약과 포탄도 충분했다. 소총 몇 자루로 무장했던 봉기군은 최신 무기를 갖췄다. 그리고 혁명이 시작됐다.

11일 새벽 1시30분께 우창 전역이 혁명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청군은 뚜렷한 지도자가 없는 혁명군에 대해 진압을 시도했으나 사상자 500여명을 내고 도주했다. 혁명군의 사상자는 약 30여명. 이튿날 청나라 최대의 군수공장이 있던 한양에서도 신군의 봉기가 일어났다. 12일에는 한커우(漢口)의 수비대도 도망쳤다. 불과 이틀 만에 우한(武漢) 3진을 장악한 혁명군에는 자진 입대하려는 대열이 꼬리를 물었다.

우한 지방은 텐진과 상하이, 광저우와 함께 가장 먼저 근대화 시설이 들어섰던 지역. 무기고와 군수 공장 뿐 아니라 총독부의 금고에는 은화 120만냥을 포함해 4,000만냥에 이르는 자금이 있었다. 당시 청나라의 연간 세금 수입의 30%를 웃도는 규모였다. 청나라 일부 병사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일찌감치 쾌속함을 타고 도주한 총독의 소식이 알려진 뒤부터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혁명군은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모조리 얻었다.

적은 병력이 시도한 우창봉기는 거대한 혁명의 첫발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치고 혁명의 대의가 적지 않게 훼손됐어도 성과를 거뒀다. 이듬해인 1912년2월12일 청나라는 중국 지배를 포기하며 권력을 내놓았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북경을 점령한 지 268년 만에 깃발을 내렸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진나라를 세운 이래 2,132년간 존속한 전제정치도 사라졌다. 중국은 물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중화민국이 들어섰다.

우창 봉기의 배경은 크게 두 가지. 경제난과 만주족·외국자본에 대한 반감 탓이다. 먼저 경제난을 보자. 청이 명나라를 몰아내던 시점의 인구가 약 1억명.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말까지 청은 강희·옹정·건륭제 등 영민한 군주들의 치세(강옹건성세·康雍乾盛世)를 거치며 생산과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건륭 59년(1794)의 인구가 3억1,300만명. 우창봉기 당시에는 4억1,000만명선을 넘었다.

과잉 인구는 1인당 곡물 섭취 감소와 함께 대량의 유민을 낳았다. 인구가 희박한 벽지를 개간하다 보니 숲이 사라지고 청 말기부터는 비가 조금만 내려도 홍수 피해로 이어졌다. 나라 경제는 속부터 멍들었다. 외세의 침입도 경제 구조를 망가트렸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이 일본에 내준 배상금만 은화 2억3,000만냥. 의화단 사건으로는 45억냥의 배상금을 1940년간까지 갚기로 약속했다.(중국이 실제로 갚은 배상금은 약 5억냥)

국고수입이 연간 1억냥을 밑돌던 청 조정은 세금을 짜냈다. 민중의 생활은 날로 곤궁해지고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농민봉기만 1906년 199건, 1907년 188건, 1910년에는 266건 발생했다. 태평성대에서 만주족 황제의 덕을 칭송했던 한족들은 모든 불행의 원인을 만주족에게 돌렸다. 만주족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1911년5월 발표된 철도 국유화령이 농민 뿐 아니라 모든 한족의 반발의 샀다.


청나라의 당시 철도 총연장은 약 9,000㎞. 주로 외국자본이 건설하던 철도 건설에 한족 자본이 투입되기 시작했으나 자본력 부족으로 진전이 없었다. 개혁을 위한 신정(新政)에 들어갈 자금원을 모색하던 청나라 조정은 민간 철도를 국유화해 외국자본에 매각, 자금을 마련한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민영철도에 투자한 한족 자본가들과 지방 관리, 사대부들은 여기에 거세게 대들었다. 민간 자본의 기존투자금은 정부가 공채를 발행해 철도 공사 완료 시점 이후에 보상한다는 방침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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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 지도자들은 만주족이 외세에게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며 민족 감정을 부추겼다. 지방 관리들이 청 조정에 철도 국유화령의 철회를 요구하는 사태도 빚어졌다. 상인들은 철시(撤市)하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나섰다. 철로를 지키자는 ‘보로(保路)운동’이 전국으로 번졌다. 청 조정은 무역 진압에 나서 반발이 가장 컸던 쓰찬성에서는 유혈사태까지 빚어졌다. 우창봉기가 바로 이 시점에서 터졌다.

후베이성에 주둔하던 신군 1만5,000명 가운데 청 조정에 대한 충성심 강한 부대를 중심으로 약 5,000여명이 쓰찬성에 파병된 마당. 남은 신군 가운데 약 5,000여명은 혁명세력에 포섭된 상태였다. 봉기를 계획하던 신군 세력은 정보가 미리 새어나가 주요 인물들이 잡혀 처형 당하자 위기감 속에 총을 들었다. 최초의 우창 혁명군 40여명을 이끈 선임자의 지위가 정목(正目·분대장)이었다.

우창에서 혁명이 일어나 후베이성을 장악했다는 소식은 중국 전역으로 퍼졌다. 연말까지 청나라 22개 성(省) 가운데 17개 성이 청 조정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장제스(蔣介石)를 포함해 일본에 유학 중이던 수많은 젊은이들도 혁명에 동참하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왔다(초기의 중국혁명은 일본 유학생들과 일본인 지지자들의 역할이 컸다. 존 페이뱅크와 에드윈 라이샤워는 공저 ‘동양문화사’에서 ‘신해혁명의 중심지는 도쿄’라고 주장한다).

들불처럼 번지던 혁명의 불길은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지휘하는 최정예 신식 군대인 북양군에 막혔다. 북진이 저지되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혁명 자금 마련을 위해 구미 각국을 순방하던 쑨원(孫文)도 귀국했다. 혁명세력은 1912년1월1일 난징(南京)에서 쑨원을 임시대총통에 추대하며 중화민국을 세웠다. 쑨원이 원하던 외국의 원조는 성사됐을까. 반대다. 열강은 혁명세력보다 수구(守舊)의 편을 들었다. 쑨원의 원조 요청은 묵살하고 위안스카이에게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위안스카이가 각종 이권을 더 많이 내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당연히 중화민국의 걸음마는 쉽지 않았다. 상황 변화를 원하지 않던 외세는 북쪽의 청과 남쪽의 공화국 간 대화를 이끌었다. 쑨원의 혁명 세력도 위안스카이의 군사력에는 상대가 못됐다. 남북 내전을 피하려던 쑨원은 결국 양보했다. 청의 전제정치를 없애고 수도를 난징으로 옮긴다는 두 가지 약속 아래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 자리를 물려받았다. 약속대로 위안스카이는 청의 조정을 겁박해 청나라를 몰아냈으나 혁명세력의 본거지인 난징으로 수도를 천도한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혁명의 과실을 고스란히 독차지한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반동정치를 펼쳤다. 혁명세력을 탄압하며 ‘공화국의 황제’ 자리까지 올랐던 위안스카이 치하의 중국은 군벌이 할거하는 혼란시대로 접어들었다. 제2, 제3의 혁명이 일어났어도 중국의 혁명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수한 피를 흘렸어도 신해혁명이 추구했던 혁명이 완성됐는지는 미지수다.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도 마찬가지다. 민족(民族)과 민생(民生)은 어느 정도 달성했는지 모르지만 민권(民權)을 이루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해 보인다.

우창봉기 이래 중국 본토에서 민주적인 선거가 실시된 적은 딱 한차례 뿐이다. 우창봉기로 시작된 신해혁명은 민주공화국 수립이라는 목표에서는 절반의 실패를 맛봤다. 혁명은 아직도 미완으로 보이지만 수천년을 내려온 봉건왕정체제를 무너뜨리고 현대 중국의 기반을 닦은 점만큼은 분명하다. 오늘날 중국과 대만이 우창봉기를 기념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대만 국경일인 쌍십절(雙十節)도 우창봉기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신해혁명은 미완일 뿐 아니라 분란의 불씨도 내포하고 있다. 신해혁명은 노쇠한 대국, 아시아의 병자를 뿌리째 흔들었다. 중국인들의 역량과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의구심은 남는다. 신생 중화민국은 왜 외몽골의 독립을 막으려 그토록 애썼나. 이민족의 지배를 물리친 한족의 민족주의 정신이 위대하다면 다른 민족의 생존권 역시 중요하다. 외몽골의 독립이 러시아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지만 그들의 선택을 중화민국이 압박했다면 중화제국주의 아닌가.

중화민국은 외몽골의 독립 당시, ‘몽골이 제2의 조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걱정했었다. 만주족의 지배를 물리쳤으면서 왜 만주족이 넓힌 땅의 지배권은 그대로 물려받으려 하는지. 오늘날 중국은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이룬 청나라의 전성기 이상으로 강력하다. 주변국들이 이를 왜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지 아시아 민족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때다. 남들과 얘기하기 앞서 우리를 생각한다. 신해혁명 105주년을 맞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국권 침탈의 시기 풍전등화의 조선과 분명 다르다고 믿는다. 그러나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의문이 하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치밀하고 자주적인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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