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병든 엘리트와 멍든 대중, 그리고 불편한 공존

FORTUNE’S EXPERT | 신제구의 ‘리더십 레슨’

법과 도덕을 비웃듯 일탈행위를 서슴지 않는 엘리트들은 일반 대중의 분노와 저항을 불러와 사회통합을 저해하게 된다.법과 도덕을 비웃듯 일탈행위를 서슴지 않는 엘리트들은 일반 대중의 분노와 저항을 불러와 사회통합을 저해하게 된다.


우리 사회를 이끄는 일부 엘리트의 일탈행위가 잇따르면서 국민들의 분노와 허탈감도 점점 커지고 있다. 사회 지도층의 각성과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지고 있다.

어느 사회나 이끄는 자와 따르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이끄는 자를 소위 엘리트(elite)라 부르고 따르는 자를 대중(mass)이라 정의할 수 있다. 엘리트는 대중에게 안녕과 정의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권력을 소유하고, 대중은 엘리트에게 존경과 추종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권력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일련의 약속이며 공존의 조건이다. 만약 이러한 약속이 깨진다면 공존도 어려워진다.


그런데 지금 이 공존의 약속이 위기를 맞고 있다. 우리가 믿었던 엘리트들이 먼저 배신했다. 그들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일부 병든 엘리트는 대중보다 잘못된 우정을, 존경보다 탐욕을 선택했다. 그들의 배신행위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들에 대한 그 어떤 통제나 절제도 없었다. 병든 엘리트에게 더 이상 명예심과 양심은 남아 있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안녕과 정의 대신에 분노와 희생을 대중에게 남겼을 뿐이다.

엘리트에겐 대중에게 없는 권력이란 것이 있다. 대중을 위해 제공된 권력을 엘리트가 사유화하고 남용하는 순간,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중들의 몫이 된다. 잘난 사람이 더 잘하리라 믿고 모든 권력을 엘리트에게 제공했기 때문에 대중에겐 남아 있는 힘이 없다. 그래서 엘리트가 병들면 대중은 어김없이 멍들고 만다. 그리고 그들의 공존은 불편해지고 혼란이 불가피해진다. 혼란에는 비용이 든다. 엘리트가 잘만 했어도 지불하지 않아도 될 비용 말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차라리 엘리트 없는 세상이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병든 엘리트에도 유형이 있다. ‘병든 금수저 엘리트’와 ‘병든 흙수저 엘리트’가 그들이다. 병든 금수저 엘리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와 명예 덕분에 탄생부터가 화려한 존재들이다. 그러니 그들은 성장과정에서 남들이 흔히 겪는 고통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다. 승자 독식의 냉정함 또한 물려받은 터라 자아도취에 빠져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거리낌없이 죄를 지어도 죄책감이 없다. 반성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사회적 책임이나 인간에 대한 교훈을 진심으로 학습한 적이 없다. 그들이 물려받은 교훈은 남들이 자신들을 두려워하게끔 만들어야 한다고만 배웠을 것이다. 믿을 것은 돈의 힘이라는 내용과 함께 말이다. 그들에게 돈으로 남을 돕는 일은 적선(積善)이나 자기과시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돈이란 엘리트주의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병든 금수저 엘리트보다 한술 더 뜨는 것이 바로 병든 흙수저 엘리트다. 이들은 병든 금수저 엘리트와 달리 물려받은 재산은 없지만 자기만의 좋은 머리와 독한 암기력으로 엘리트가 된 인물들이다. 또한 세상에 대해 복수하는 방법은 성공하는 것이며 성공한 후에는 자신이 그토록 저주했던 세상을 지배하고픈 욕망으로 자신을 변질시킨다. 그래서 흙수저 엘리트가 출세한 후 가치관이 병들면 자신이 지키고 이끌어야 할 대중이 말 그대로 개돼지(?)로 보이기도 한다.


이들에게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많이 배웠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날’이 올 때까지 무서울 정도로 자신을 감추고 이익과 손해의 인간관계를 계산하며 자기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심과 정의는 이들에겐 사치에 불과하다. 자기 안에는 자기만 있다. 다시는 흙수저의 불행한 운명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그들을 더욱 병들게 한다. 그들은 반성과 항복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자기실패로 인식한다. 만약 위기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버티면 곧 지금의 위기는 지나간다는 꼼수에 능숙하며, 자신을 대신할 희생양을 찾는 데 그 좋은 머리를 거침없이 활용한다. 그러니 좋은 머리를 좋은 일에 쓸 여유가 없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병든 흙수저 엘리트가 병든 금수저 엘리트보다 치료하기 힘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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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병든 엘리트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세상이 변했다는 점이다. 과거에 멍든 대중은 그저 참고 또 참았다. 힘도 없지만 용기는 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힘없음을 팔자로 돌리고 참을 도리밖에 없었다. 때로는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하게 정부와 사회의 엘리트들을 믿고 기다렸다. 기다려본들 아무것도 얻은 게 없어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대중이 하나로 연결되어 같은 정보를 공유하고 같은 분노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더욱이 병든 엘리트의 반복된 판단력 상실은 대중의 단결에 더욱 확신을 주었다. 대중은 스스로를 지키는 길을 선택했고 멍든 가슴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대중의 용기와 저항이 더욱 거세질 것이다.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기대는 이미 사라졌다.

그렇다면 해법은 없을까? 단죄되지 않은 불행한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첫째, 정부가 먼저 나서서 단죄되지 않은 병든 엘리트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강력하게 시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조직은 바로 정부가 될 것이다. 더 이상 뇌사상태의 정부를 힘겹게 방어하기보다는 단 한번이라도 정의의 편에서 병든 엘리트를 단죄하고 멍든 대중의 가슴을 치유해주어야 하다. 그래야 기회가 있다. 만약 예전처럼 습관적으로 병든 엘리트를 감싸거나 공범행위를 자행한다면 까칠해진 대중이 제공할 배려는 없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정부 스스로 정화작업에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병든 엘리트가 정부 요직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면 개그와 다를 바 없다. 정부의 고객은 대중이며 국민이다. 동료를 아끼기보다는 대중을 챙겨야 한다. 챙겨야 할 사람을 위해 아끼는 사람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정부 지도자의 역할이다. 국민과 싸우는 정부라면 무정부상태와 같다.

둘째, 정부의 역할이 또 하나 있다. 병든 엘리트를 더 이상 양산하지 않고 선량하고 진정성 있는 엘리트가 마음껏 소신을 펼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좋은 머리를 나쁜 일에 쓰기보다 좋은 일에 쓰는 것이 자신에게 더욱 이롭다는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사회적 제도를 준비해야 한다. 돌아보면 과거에도 병든 엘리트는 존재했지만 건강한 엘리트도 많았다. 우리는 건강한 엘리트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사회적 약속을 다시 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셋째, 병든 금수저 엘리트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배워야 하고 자신이 원래부터 공짜로 소유한 금수저를 자랑만 하지 말고 기꺼이 대중들을 위해 겸손한 자세로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 그토록 지키려고 갈망하는 경제적 유산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부(富)가 3대(代)를 못 간다는 말을 결코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병든 흙수저 엘리트는 자신이 품어 왔던 세상에 대한 분노를 헌신으로 바꿔야 한다. 뛰어난 암기력과 함께 더불어 사는 지혜와 사람에 대한 경외심을 갖추기 바란다. 만약 이 충고에 비웃음을 던지고 싶다면 대중의 비웃음을 오래도록 견뎌야 할 것이다.

어느 사회나 엘리트가 병들면 대중은 멍든다. 멍든 대중은 언제나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다. 대중이 없으면 엘리트도 없다. 엘리트의 가치는 대중에게 안녕과 정의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존경과 추종을 받는 것에 있다.






신제구 교수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겸 국민대학교 리더십과 코칭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국내 주요 기업 등에서 리더십, 팀워크, 조직관리 등에 대해 강연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대한리더십학회 상임이사, 한국리더십학회 이사 등을 맡고 있으며, 크레듀 HR연구소장, KB국민은행 연수원 HRD컨설팅 팀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신제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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