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투자 대중화를 이끈 찰스 메릴





정장의 젊은 신사. 증권사 창구 직원의 대부분은 말쑥하다. ‘스펙’(specification)도 휼륭하고 급여도 높은 편이다. 시계를 100년 전으로 돌리면 정반대다. 겉은 화려하지만 나이 많은 사기꾼이 많았다. 미국의 금융 역사가 존스틸 고든은 ‘월 스트리트 제국’을 통해 당시 주식시장과 증권 브로커를 이렇게 그렸다. ‘혼탁 그 자체다. 무법천지인 월가의 증권 브로커는 가족마저 등쳐먹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개혁으로 구악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대중의 눈에 증시는 음험한 곳으로만 비쳤다.’


야바위꾼의 이전투구장 같던 월스트리트를 믿을 수 있는 곳으로 변모시킨 주인공은 찰스 메릴(Charles E. Merrill). 국내에도 그의 일생과 투자 경험, 경영 철학을 담은 번역서가 있다.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교 에드윈 퍼킨스 교수의 ‘찰스 메일과 주식 투자의 대중화’. 이 책을 번역한 최성범 우석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찰스 메릴의 업적을 이렇게 압축해 표현한다. ‘From Wall Street to Main Street.’ 월가에 머물던 미국의 주식시장을 대중화시켰다는 의미다.(원제도 비슷하다. Wall Street to Main Street:Charles Merrill and Middle-Class Investors)

1885년10월19일 플로리다에서 가난한 시골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대학 2학년을 중퇴한 22세 때 월가와 인연을 맺었다. 특유의 붙임성으로 고객을 확보한 그는 1914년 증권 브로커 사무실을 열고 이듬해에는 친구이자 채권전문 브로커인 에드먼드 린치와 합병, 대형 사무실을 차렸다. 한때 세계 2위 증권사였던 메릴린치의 출발점이다.


메릴의 주요 투자 종목은 크레기(오늘날 K마트)와 J C 페니 같은 체인점. 1920년대 호황을 타고 급성장하던 메릴은 1929년10월 월가의 주가 대폭락 18개월 전부터 증시가 이상 과열됐다는 판단 아래 주식은 물론 거래소 회원권마저 팔아치웠다. 덕분에 대공황에서도 재산을 지켰다. 증시에 다시 돌아온 것은 1940년. 본격적인 개혁에 나선 것도 이때부터다. 조사기능과 매매업무를 분리하고 중개인들에게 고정급을 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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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메릴이 증권업계 최초로 직원들에게 고정 급여를 주기 시작한 데는 이유가 있다. 수수료 수익을 얻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주식을 사고 파는 행위를 막기 위해서다. 백화점을 본 따 전국에 수많은 지점망을 설치하고 전신망도 깔았다. 은행이라는 이름 대신 ‘증권사’라는 명칭도 이때부터 쓰였다. 증권 브로커와 증권사를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메릴이다. 서비스는 높이고 수수료는 최소화한 그의 증권사에는 중산층 고객이 몰렸다.

윤리경영과 전국 지점망, 대대적인 광고는 투자 인구를 늘렸다. 신문을 활용한 광고도 파격적이었다. 6,000단어에 이르는 ‘투자 가이드’ 광고는 오늘날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100대 광고’의 하나로 손꼽힌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의 주식 투자 인구는 세대주의 16% 남짓한 수준. 찰스 메릴이 사망한 1956년 투자 인구 비중은 50%까지 치솟았다. 오늘날 증시가 일반인이 참여하는 시장으로 자리 잡은 데는 주식 대중화시킨 그의 업적이 녹아 있다.

찰스 메릴은 ‘조사 후 투자’를 투자 원칙으로 삼고 인력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미국 증권업계 처음으로 신입사원 연수 제도를 도입, 인재를 키웠다. 주변에서 월급을 줘가며 애써 키운 인력이 다른 회사로 이직할 수 있다며 반대해도 메릴은 밀어붙였다. ‘증권업계 전체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확신에 의해서다. 실제로 메릴린치의 연수생 가운데 4분의 1은 회사를 옮겨 미국 증권업계의 중추로 자랐다. 메릴린치 증권은 ‘인재 사관학교’라는 별명을 얻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찰스 메릴 생전에는 미국내 1위 소매 증권사였던 메릴린치 증권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파산한 채, 뱅크 오브 아메리카로 인수되는 운명을 맞았다. 메릴린치 증권사의 비운에도 그 설립자인 찰스 메릴의 명성은 아직도 여전하다. 젊은 시절 백만장자 반열에 오른 찰스 메릴은 징병검사에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어떻게든 입대해 참전하려 애썼다. 말년에는 자선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우리도 존경할 수 있는 기업인이 많으면 좋으련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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