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내우외환 고구려 망국의 교훈 되새겨야

황원갑 소설가·역사연구가

연개소문 후계자 없이 '장기독재'

결국 자식간 권력 다툼으로 멸망

유비무환 자세로 국론통합 나서야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668년 9월26일. 그날이 올해는 양력으로 10월26일이다. 이보다 4년 전인 664년에는 집권자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었다.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營留王)과 친당파 대신들을 숙청하고 보장왕(寶藏王)을 세운 후 23년간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연개소문은 죽기 전 아들 3형제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너희는 절대로 벼슬을 탐내어 서로 다투지 마라. 서로 반목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

연개소문은 당나라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왕이던 불세출의 영웅이었지만 ‘자식농사’는 잘못 지었다. 그가 죽자 세 아들이 골육상쟁을 벌인 것이다. 연개소문이 죽을 때 맏이 남생(男生)의 직위는 막리지, 둘째 남건(男建)은 주부, 막내 남산(男産)은 조의두대형으로 모두 고위직이었다. 이것이 연개소문의 한계요 고구려의 비극이었다. 오로지 자식들이라는 이유로 자질을 확인하지도 않고 높은 벼슬을 줘 국정에 참여시킨 것이다. 그래서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고 한 것이다.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남생이 대막리지에 올랐으나 이내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남생이 지방을 순시하는 사이 소인배의 이간질에 넘어간 것이었다. 남건은 남생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이 대막리지가 됐다. 이에 격분한 남생은 이성을 잃고 당에 항복해버렸다. 당 조정은 환호했다. 연개소문이 버티고 있어 그동안 정복하지 못한 고구려였다. 그 무섭던 연개소문이 죽자 이제 고구려가 이빨도 발톱도 모두 빠진 병든 호랑이가 돼버린 것이었다.


보장왕 25년(666) 12월 당이 제3차 고구려원정군을 일으키자 반역자 남생은 당군의 앞잡이가 됐다. 당 고종은 이듬해 7월 신라에 칙령을 보내 고구려를 칠 군사를 보내도록 명했다. 신라의 문무왕과 김유신은 20만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백제에 이어 고구려 정벌을 위한 나당연합군이 다시 발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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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7월부터 100만 대군에게 포위된 평양성은 완전히 고립된 채 한 달을 버텼다. 조정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내분을 벌였다.

주전파 우두머리는 남건, 주화파 우두머리는 남산. 두 형제는 대판 싸우고 갈라섰다. 남산이 주화파를 이끌고 항복했으나 남건은 끝까지 결사 항전을 다짐했다. 하지만 하늘이 이미 고구려 편이 아니었다. 9월26일 새벽. 반역자들이 내통해 성문을 열자 나당연합군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갔다. 성안 곳곳에서 난전이 벌어졌지만 때는 이미 늦어 그날 평양성은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당군 총수 이세적은 보장왕과 태자, 남건과 남산 형제, 대신과 장수, 백성 등 남녀 포로 20만명을 이끌고 장안성으로 돌아갔다. 국왕과 형제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그 앞에서 반역자 남생은 당나라 장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말을 타고 갔다. 개선장군 자격이었다.

900년 역사의 고구려가 건국 50년도 안 된 당나라에 하루아침에 망한 것은 이처럼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첫째가는 원인이었다. 거기에 제해권 상실로 인한 해상방어력 약화, 수·당과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소진된 탓이었다. 또 유능한 후계자를 양성하지 않은 연개소문의 독재 권력이 내분을 불러온 결과 민심이 흩어진 탓이었다.

결국 국운의 융성은 국리민복(國利民福)과 부국강병(富國强兵)에서 오고 망국의 재앙은 내우외환에서 비롯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고구려의 망국사도 분명히 일러준 것이다. 모름지기 위정자가 돼 무비유환(無備有患)의 어리석음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국론 통합도 중요하다.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나라의 망국사가 일러주는 통렬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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