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아찔한 도시락

[식담객 신씨의 밥상] 마지막 이야기 '도시락'



“선생님, 혹시 술냄새 빨리 빼는 방법 아세요?”

늦은 밤 택시에 올라 기사님께 처음 건넨 말입니다.


술을 좀 마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신임 회장님과의 미팅이 잡혀 있어, 일찍 귀가할 생각이었습니다.

퇴근 무렵 오랜만에 절친한 후배의 연락을 받아, 함께 저녁을 먹자는 간청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밥만 먹고 일어서려고 했는데, 후배의 고민이 발길을 막았습니다.

맥주만 마시고 9시에 들어가겠다던 플랜B는, 막걸리와 소주에 틀어져버렸습니다.

입 안에서 쌉쌀텁텁한 알코올 비린내가 납니다.

이 정도 냄새면 내일 아침에도 빠지긴 틀렸습니다.

“초코우유 드세요.”

기사님 목소리에 침착한 자신감이 어려 있습니다.

“술 좀 세게 마시면 다음날 냄새가 남잖아요. 우리처럼 손님 모시는 기사들은 조심한다고 하는데도 안 빠질 때가 있어요. 그때는 초코우유죠. 버스 기사들도 애용하는 방법입니다. ”

오옷!

사막의 오아시스, 가뭄의 단비 같은 정보입니다.

집에 도착할 무렵, 기사님이 한 마디 덧붙이십니다.

“500ml짜리 하나 먹으면, 어지간한 냄새는 빠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요기 편의점 앞에 세워주세요.”

매대를 샅샅이 훑어도, 500ml짜리 초코우유는 없습니다.

대신 235ml짜리 허쉬초콜릿 드링크 4개를 고릅니다.

“손님, 이거 2+1상품이네요. 두 개 더 가져가세요.”

그렇게 집에 들어가며 세 개를 들이킵니다.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남은 쵸콜릿드링크 세 개를 흡수합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팀장님이 미리 와계십니다.

“안녕하십니까?”

“응. 그런데 신과장 혹시 술 많이 했나? 회장님 뵙는 자린데.”

아, 당황스럽습니다.

초코우유를 식스팩이나 마셨는데.

“아... 아닌데요.”

“그런데 냄새가 나는데, 이게 무슨 냄새지?”

“음... 그게...”

“그게 뭔데?”

“초코우유요.”

회장님과 우리팀원 세 명이 함께하는 도시락 미팅, 혹시라도 냄새가 퍼질까봐 가장 먼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회장님께서 푸근한 목소리로 의견을 들려 주십니다.

“사보가 좀더 친근하고 재밌으면 좋겠습니다. 나처럼 나이가 있는 사람은 작은 글자가 잘 안 보여요. 글자를 조금만 키우고 삽화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어떻겠어요?”

반가운 이야기입니다.

딱딱한 경영활동 비중이 높았는데, 편안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늘리자니 고맙습니다.

글자 크기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하지만, 술냄새 걱정에 입을 벌려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얼굴에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는 리액션만 무한반복합니다.

도시락이 나옵니다.


작고 네모난 쟁반에 컵라면과 삶은 달걀, 방울토마토가 소담스레 담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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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컵라면을 좋아하는데, 아내가 건강을 걱정해서 집에서는 못 먹어요. 가끔 출장갈 때나 이렇게 먹는데, 스릴 있는 별밉니다.”

호텔 정찬만 드실 줄 알았는데, 옆집 아저씨처럼 소탈하십니다.

부인의 눈치를 보는 건 과장이나 회장님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따끈한 달걀반숙과 라면국물이 헤진 속을 든든하게 달래줍니다.

방울토마토의 푸릇한 향에 입안이 상쾌해집니다.

간소하고 실속있는 메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랫배에 천둥이 칩니다.

초코우유 때문입니다.

술 냄새 걱정에 매몰돼,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는 체질인 걸 깜빡 잊었습니다.

우유 두 잔에도 온종일 화장실 들락날락 모드인데, 마신 양을 더해보니 1.5리터 가까이 됩니다.

그렇다고 자리를 비우는 것도 망설여집니다.

화장실에 가지 말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지만, 지금 가면 내 미래도 함께 가버릴 것 같습니다.

아랫배가 쑤시고 식은땀이 흐르지만, 참을 수 있습니다.

택시기사 아저씨의 흐뭇한 미소가 야속하게만 느껴집니다.

다행히 자리는 곧 끝납니다.

장이 토라지지 않게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자, 사보 재미있게 만들어 주세요. 반가웠습니다.”

그 말씀에 나도 모르게 질문이 나옵니다.

시한폭탄이 뱃속에서 째깍대는데...

“회장님, 회장님께서 가장 재밌게 보시는 코너는 어떤 건가요?”

회장님이 잠시 생각하시더니 웃으며 대답하십니다.

“만화요. 맨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데, 위트있고 코믹해서 좋아합니다.”

그렇게 자리를 마치고 아주 조심스럽게 화장실에 도착합니다.

요란하게 위기에 대처하며, 택시기사 아저씨를 원망합니다.

하지만 통증이 사그러지며, 기사님에 대한 마음도 누그러집니다.

그렇게 평화는 소소하게 찾아오나 봅니다.

아찔하지만, 꽤 괜찮은 도시락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훈

1. 침묵이 금이다.

2. 술냄새는 식도를 수퍼타이로 빨아도 안 빠진다.

도시락은 도슭이란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조선 영조 때의 고시조집인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농민의 일상을 노래한 시조가 있습니다.

“논밭 갈아 기음 매고 뵈잡방이 다임 쳐 신들메고

낫 갈아 허리에 차고 도끼 버려 두러매고 무림산중(茂林山中) 들어가서

삭다리 마른 섶을 뷔거니 버히거니 지게 에 질머 지팡이 바쳐 놓고

새암을 찾아가서 점심(點心) 도슭 부시고 곰방대를 톡톡 떨어

닢 담배 퓌여 물고 코노래 조오다가

석양이 재 넘어갈 제 어깨를 추이르며 긴 소래 하며 어이 갈고 하더라”



*그동안 ‘식담객 신씨의 밥상’에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소박했던 이야기밥상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 작별인사로 찾아뵙겠습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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