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내정자는 이날 오후 국민대 본부관에서 마지막 강의를 앞두고 기자들과 만나 “상당한 권한을 위임하고 국정의 책임을 다할 총리를 지명하면서 단순히 전화로 했겠느냐”라며 대통령과 독대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제안을 받은 시기에 대해서는 지난 일요일이나 월요일쯤이라면서 앞서 일주일 전이냐는 질문에 긍정한 종전 발언을 번복했다.
김 내정자는 또 박승주 국민안전처 장관 내정자를 추천한 이유를 묻자 “박 내정자 뿐만 아니라 임종룡 경제부총리 내정자 (추천)도 저와 무관하지 않다”며 “경제와 안전 문제가 급하다 보니 추진력이 강한 사람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했다”고 밝혔다.
김 내정자는 야당의 반대를 두고 “지금 이 시국에 어떻게 반대를 안 할 수 있겠느냐. 반대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분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시국에 총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저 역시 그 의구심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다. 각자 나름의 판단이 있을 수 있겠다”고 말을 아꼈다.
이날 밤 10시께 수업을 마치고 나온 김 내정자는 “국회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것은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라면서도 ‘내치 대통령’이라는 청와대의 표현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그냥 (제안을) 받지는 않았다”며 책임총리로서 강력한 권한을 보장받았음을 시사했다.
또 “박근혜 대통령 방패막이로 나선 것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다”며 대통령 하야와 탄핵 요구는 자신과 별개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김 내정자는 “제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헌정중단이나 국정붕괴는 어떤 형태로든 안된다는 것”이라며 “회사의 주인이 바뀌더라도 회계는 돌아가고 영업은 계속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개헌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칼럼에서 밝혔듯 궁극적으로 국회에서 해야 할 일이고 국민의 의견이 중요하다”며 “정부는 행정적 지원을 하는 곳이다. (대통령의 뜻이 정부 주도의 개헌이라면) 저하고는 생각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는 참여정부에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했던 ‘원조 친노(친노무현)’ 인사다. 참여정부 이후로는 공직과 거리를 뒀고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정치권 내 친노계의 행보에는 비판적 입장을 보여왔다. 그동안 새누리당과 국민의당 등 여야 할 것 없이 영입 대상으로 꼽았으며 최순실 게이트로 위기에 빠진 박근혜 정부의 국정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총리 후보자가 됐다.
하지만 여야가 거국중립내각을 논의하던 와중에 박근혜 대통령이 돌연 그를 총리로 내정하자 야 3당은 임명 철회를 요구하며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부하기로 해 임명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김 후보자 스스로도 최근까지 ‘대통령은 2선으로 물러나고 국회가 총리를 추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총리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말을 뒤집은 셈이 됐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반 께 서울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정국이 빠르게 변하니 오늘은 소감을 말씀드리기보다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면서 몸을 낮췄다. 또 지난 2013년 우병우 전 민정수석 장인인 이상달 전 정강중기건설 회장의 추도식에 참석한 것에 대해 “우 수석에 대해서는 당연히 잘 모르고 장인이 고향 향우회 회장이어서 간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가 임명 자체가 쉽지 않은 국무총리직을 수락한 배경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우선 박 대통령으로부터 책임총리에 대한 확답을 받았기 때문에 임명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을 감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참여정부에서 임기 말 대통령을 보좌한 경험을 가진 김 후보자가 레임덕 정부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데 일종의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전언도 있다.
또한 그는 내정 통보 시점 즈음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10월31일자 6면 참조)에서 남은 임기 동안 박 대통령이 2선으로 물러나고 차기 총리가 권한을 갖고 내치를 맡으며 이원집정부제 등 앞으로 개헌에서 논의할 정부 형태를 실험하는 기간으로 삼아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대통령의 권한이 땅에 떨어진 현시점이 적기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김 후보자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탄핵과 하야 요구 속에서 국무총리직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내일 얘기하겠다”고만 밝혔다.
행정학과 교수 출신인 김 후보자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지방분권’이다. 이 같은 김 후보자의 소신은 노 전 대통령과의 만남으로 연결됐다. 1993년 노 전 대통령이 설립한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특강을 진행한 것을 계기로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 2002년 노무현 대선후보의 정책자문단장을 맡아 공약 밑그림을 그렸다.
그가 노 전 대통령의 남자로 불린 것은 청와대 정책실장을 맡으면서다. 이때 그는 종합부동산제, 동반성장 전략, 제주특별자치도, 혁신도시와 기업도시, 톱 다운 예산제도 시행 등을 내놓았다. 그러나 김 후보자는 “헌법처럼 바꾸기 힘든 부동산 정책을 만들겠다”면서 부동산 정책에서 강경 태도를 유지했고 “세금폭탄”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것으로 회자하면서 입길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임기 말에도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대통령 정책특별보좌관 등 ‘순장조’로 일했다. 이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됐을 때는 논문표절 논란에 휩싸이며 13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김 후보자는 당시 논문 중복 게재에 대해 사과했고 2007년 2월 검찰은 기존 논문을 BK 21 사업의 연구 결과물로 제출해 교육부 지원금을 편취했다는 의혹에 대해 무혐의로 결론 내렸다.
참여정부 이후에는 공공경영연구원·사회디자인연구소 등의 이사장을 맡으며 주로 시민사회에서 지방자치 확립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정치권의 친노계 인사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 2009년 국민참여당에 합류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주변에 “노 대통령은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강조하셨는데 정치하는 분들은 ‘조직된 힘’에만 관심을 기울인다”고 지적했다. 최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북한 인권결의안 기권 논란에 대한 태도에도 실망감을 감추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