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그레셤 법칙의 진짜 주인공은?





토머스 그레셤(Thomas Gresham).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다른 업적도 많다. 왕립 런던증권거래소(the Royal Exchange) 설립을 주도하고 대학도 세웠다. 사망(1579년 11월21일·60세)할 때 ‘대학을 설립하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후손들은 1579년 그레셤 대학을 개교했다. 런던 한복판에 대학을 어렵지 않게 세울 만큼 그는 막대한 재산을 남겼다.


그레셤은 출생의 제비뽑기부터 운이 좋았다. 부유한 포목상 겸 무역상인이며 런던 시장을 지낸 리처드 그레셤 경의 아들로 태어난 금(金) 수저. 케임브리지 대학을 다니면서도 삼촌 밑에서 무역업을 배웠다. 돈 많고 대학까지 나온 그레셤은 젊은 시절부터 가업인 왕실 자금관리까지 맡았다. 유럽 금융의 중심지인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했던 그의 주특기는 영국 왕실 대외 채무 재조정. 고금리 대출을 저금리로 바꾸는 데 남다른 실적을 거뒀다.

헨리 8세부터 엘리자베스 1세까지 4명의 영국 국왕과 거래하거나 재정고문으로 일하며 가문의 재산도 크게 불렸다. 외환거래와 차익과 무역, 밀수를 통해 영국 최고 갑부로 꼽힐 만큼 부를 쌓았다. 뛰어난 상인이었으나 그레셤은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해외에 파견된 왕실 상인은 국왕의 개인 밀정을 겸하는 경우가 많아 신분을 애써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레셤의 법칙’도 마찬가지다.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한참 동안 ‘그레셤의 법칙’이란 용어조차 없었다. 당연할 수 있다. ‘경제학’이라는 용어조차 통용되지 않던 시대였으니까.

그레셤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후반부터. 스코틀랜드 출신 경제학자인 헨리 맥클라우드가 1858년 ‘정치경제학 요론’에서 그를 언급하면서 이름이 퍼졌다. 그레셤 사망 후 3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레셤의 법칙’이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화폐론을 심도 깊게 연구한 철학자 고병권의 ‘화폐, 마법의 사중주’에 따르면 그레셤을 ‘그레셤 법칙의 주창자’라고 지목한 맥클라우드의 주장이 세상 사람들의 고정관념으로 굳어졌다.


정작 그레셤은 ‘그레셤의 법칙’을 말한 적이 없다. ‘그레셤의 비망록(1559)’에도 그런 기록이 안 나온다. 다만 즉위 직후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보낸 편지에 엇비슷한 구절이 있을 뿐이다. ‘네덜란드와 영국 두 나라에서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달라, 양질의 영국 은화가 네덜란드로 유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정도다. 더욱이 그레셤은 이런 현상이 영국의 대외 무역과 관련돼 발생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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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셤을 ‘그레셤 법칙’의 주인공으로 만든 맥클라우드조차 1896년 저술한 ‘경제학사’에서는 그레셤 법칙의 주창자로 두 명을 추가시켰다. 프랑스의 사제 니콜 오렘과 폴란드 태생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로저 백하우스 버킹엄대 교수의 ‘지성의 흐름으로 본 경제학의 역사’에 따르면 니콜 오렘(Nicole Oresme:1320~1382)은 1371년 펴낸 ‘화폐의 기원, 본성, 법률, 변경에 관한 논고’에서 이 법칙을 언급했다. ‘흑사병과 인구 감소로 세입이 줄어든 각국이 주화에서 금이나 은의 함유량을 줄이는 풍토 탓에 통화의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비판한 것. 미국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오렘을 ‘최초의 통화주의자’로 꼽는다.

철학부터 수학·정신분석학·음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특히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지구가 둥글다면’ 세계를 도는 데 선박편으로 4년 1,575일이 걸린다는 계산을 내놓은 적도 있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도 마찬가지. 천문학 뿐 아니라 수학과 미술, 화폐이론에 두루 밝았다. 화폐 관련 책자 7권을 남길 정도로 화폐제도에 관심이 많았던 코페르니쿠스는 그레셤이 태어난 1517년 저술한 ‘화폐론’에서 ‘저질 주화가 공급되면 금세공업자들이 양질의 옛 주화에서 녹여낸 금과 은을 무지한 백성들에게 팔 것’이라며 ‘악화가 옛 양화를 몰아내기 위해 도입된다’고 주장했다.

니콜 오렘과 코페르니쿠스, 둘 가운데 누가 ‘그레셤의 법칙’을 주창한 인물일까. 후자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한 편이다. 니콜 오렘의 저술은 후대에 개작됐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반면 코페르니쿠스는 다른 저작들에서도 비슷한 시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이론을 그레셤의 법칙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의 법칙’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긴 그레셤 법칙의 저작권자를 찾는 게 무의미할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기원전 405년 무대에 올린 ‘개구리’에 그 개념이 나온다는 주장도 있다. 희곡의 아버지로도 불릴 만큼 수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소크라테스의 죽음에도 영향을 미친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순금과 순은이 숨어버리고 구리만이 횡행하는 세상을 비웃으면서…(하략)’. 심지어 성서에서 그레셤의 법칙을 찾는 이들도 있다. 태초부터 그레셤의 법칙 같은 현상이 존재했다는 얘기가 맥이 닿는다. 확실한 것은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그레셤 법칙에도 그레셤이 없다는 점이다.

그레셤 법칙은 화폐론에서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금속 화폐가 거의 사라진 탓이다. 대신 온갖 영역으로 진화하고 있다. ‘짝퉁’의 범람과 학력 위조, 시험지 유출도 그레셤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일부 문제 공직자들이 공무원 전체의 이미지를 떨어트린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집단은 나쁜 행각이 들통나면 물 귀신 작전을 펼친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정치 환멸감을 퍼지는 현상도 악화에 의한 양화 구축에 해당된다. 악화 대처법은 무엇일까. 경제든 정치든 해법이 비슷하다. 악화를 찾아내 얼마나 해로운지 정밀 규명하고 폐기해야 양화가 자리 잡을 수 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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