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빼고 다 해본 ‘그’와 ‘그녀’의 특별한 목요일을 담은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에서 임세미는 배종옥, 정재은, 유정아의 대학생 시절 회상장면에 등장해 대선배들에 밀리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혼란의 시기 학생 운동하던 카리스마로, 한 남자를 향한 순수한 열정으로 무대에 올라 관객을 몰입시키던 그녀의 모습을 한동안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드라마와 무대에서 담금질해온 그녀의 연기는 2년이 흘러 ‘쇼핑왕 루이’를 통해 코믹과 엉뚱함이 더해진 ‘독특한 악녀’ 캐릭터를 만나 화려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Q. 만나자 마자 ‘일이나 하세요’ 라는 말을 들을 것 같다.
아, 그 대사가 진짜 많이 등장했죠. 그처럼 반복적인 대사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연기를 조금 더 잘했다면 기억에 남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요. 루이, 인성, 금자처럼 독특하게 뽑아먹을 수 있는 캐릭터는 기억에 잘 남죠. 저는 드라마 안에서 상황을 잘 전달하는데 집중했어요. 초반에 본능을 감추고 이야기를 정리하는 역할을 했다면 후반부에는 내뜻대로 안돼 폭발하면서 귀여운 짜증을 내는 모습으로 바뀌었죠.
Q. 맞다. 백마리는 초반과 후반이 극과 극이었다.
이랬던 적 없던 팀장이 변해버리는거죠. 워너비 스타, 우상같던 여자가 ‘왜 저렇게 변했지’라며 시청자들이 당황하는 모습은 의도된 거에요. 너무 앞서가면 감독님께서 제제하기도 했죠. 과격하고 막장으로 가면 안되니까. 현장에서는 ‘백마리 미친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만큼 착하고, 완벽하고, 아름다움의 모든 것을 갖고 있던 인물이 무너지니까 조금만 오버해도 충분한 효과를 낼 수 있던 것 같아요.
Q. 외양적인 면 뿐만 아니라 완벽주의자에서 허술해졌다고 할까.
처음부터 제 캐릭터가 극악적인 악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성선설을 이야기하듯 착한 작품이었던 만큼 아무리 생각해도 강하게 가면 안되겠더라고. 첫 방송에서 루이가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 엄마한테 ‘걔가 죽었으니 내가 사모님이 못되잖아’라고 말할 때부터 백마리는 어이없고 철부지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후반으로 갈수록 사랑스럽고 귀여움이 더해졌죠.
Q. 사랑 이야기를 해보자. 두 남자와 삼각관계가 끝까지 꼬였는데.
루이와 복실이는 온전히 순수한 사랑을 그려요. 저와 차중원 본부장(윤상현), 조인성(오대환)은 모두 처음 겪는 감정을 쏟아내죠. 세 사람 모두 난생 처음 저런 사람을 만난거지만 저는 백마리는 이들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맛있는 음식을 찾거나 물건을 사듯이, 싫증나면 물건 바꾸듯이 남자도 쟁취하는 인물이었다고 할까.
Q. 사랑도 사람도 CG만 더해지면 어김없이 빛났다.
CG가 확실히 한몫했죠. 아무래도 저와 백선구(김규철) 부녀가 악의 축이었기 때문에 CG의 희생양이 됐잖아요. 얄밉게 보일 수 있는 부분을 유쾌하게 그리면서 시청자도 이들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완벽한 여자가 무너지는데 거기서 사람다운 면을 발견하고 정을 주셨던거죠.
사실 망가지고 창피하다는 생각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방송에서 CG가 입혀진 장면을 볼 때마다 흥미로웠어요. 가식적인 면을 궁서체로 표현하거나, 노래방 장면처럼 발연기도 보여주고, 악마가 됐다 천사가 되기도 하고, 파리가 머리위를 돌고, 방귀가 하늘을 날고…. 전부 다 귀엽지 않았어요?
Q. 시청자들은 조인성과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많이 내비쳤는데.
알고 있었어요. 저도 8부 이후 마리와 인성이 만나 에피소드를 만들면서 커플로 이어질까 궁금했거든요. 매회 유머를 어떻게 그려내야 하나 고민했는데 결국에는 마리가 더럽커플을 접어두고 한번 차였던 다른 상품(?)을 고르더라고요. 사실 여자는 남자에게 상처받으면 다시 설레지 않거든요. 그런데 마리는 다시 반해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마리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드라마가 동화책처럼 덮고 나면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만 마리와 그녀의 남자들은 마치 2편을 만들어낼 것처럼.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됐을까, 재미있게 상상해 볼 수 있잖아요. 물론 여기까지 끌어오는데 친남매와 같았던 (오)대환오빠의 도움이 가장 컸죠.
Q. 조인성과 엮였던 웃긴 에피소드 이야기를 빼놓으면 서운하다.
차 안에서 볼일 본 장면에 대해 가장 많이 불어보세요. 제 모습을 생각하면 내려버리면 그만이지 사람한테 이리가라, 저리가라, 어떻게 할거냐, 나 살려라 그렇게까지 괴롭히고 싶지는 않은데. 그 장면에서는 대체 내가 무슨 대사를 뱉었는지 모를 정도로 즐겼던 것 같아요.
엉덩이를 만지고 치한으로 몰리는 장면에서는 (오)대환선배가 총각이었으면 조금 불쾌할 수도 있었겠지만 다둥이 아버지시기도 하고…. 친남매처럼 너무나 친근하게 대해주신 만큼 그 외에도 모든 장면을 정말 재미있게 촬영했어요. 결과물도 아주 잘 나온 것 같고.
Q.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왜 갑자기 차중원에게 다시 반했는지 모르겠다.
작가님의 입장, 엄마들의 입장을 비친 결말이 아닐까 싶은데. 한없이 곱게 기른 딸이 백수인 인성에게 간다면 안된다는 생각도 있었을 거고, 한번 차였던 마리가 차중원에게 다시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물론 차중원은 장뇌삼 아가씨에게 꽂히지만. 다들 왜 그렇게 끝났냐고 물어보는데 해석은 다양할 수 있죠. 주변 사람들에게는 ‘내가 쓴건 아니잖아’ 라고 말해줘요.
Q. 드라마 분위기가 항상 들떠 있었다.
현장에서도 많이 느꼈어요. 장르도 로맨틱 코미디에다가 느낌은 웹툰이나 동화 같았으니까요. 어떤 재미난걸 다 붙여도 소화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어요. 매 신이 재미있었고, 뻔한 이야기가 되다가도 휙 틀어 만화같이 표현한 부분도 있었잖아요. 그 포인트를 찾아서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을까 하는 고민도 했고, 감독님께서도 그런 요소를 찾으려 했던 것 같아요.
Q. 동화같은 캐릭터가 가득한데 백마리만 정상으로 느껴진다.
서울에서 오래 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캐릭터에 백마리가 가장 적합하니까요. 루이는 모자란건지 외국물을 먹은건지 독특한 말투를 쓰고, 차중원은 명령조, 복실이는 사투리를 쓰니까 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 외에도 모든 캐릭터가 저마다 색이 있으니까 나도 말투를 바꿔야 하나 고민했는데 감독님께서 ‘마리는 나중을 위해 평범하게 시작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마음껏 풀어주셨죠.
Q. 흐름이 이어질수록 여성을 집중 공략하는 판타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수많은 클리셰가 담겨있고, 시작부터 끝까지 예측 가능한 스토리잖아요. 우리 드라마 특성이 다음회가 예상되는 거라고 할 수 있죠. 음악은 웅장하고 뭔가 반전이 있을 것 같은데 결국 사람들이 ‘저럴줄 알았어’ 하는 전개로 이어지잖아요. 뻔한 내용이 있음에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시청자 입장에서 불편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가벼움을 추구하는 드라마였고, 짜임새가 강하든지 반전을 준다든지 하는 머리아픈 싸움보다 쉽게 읽고 착하게 바라보는 장점을 제대로 살린 작품이었기에 어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동화같은 드라마’가 딱 맞는 말이에요.
Q. 필모그래피를 보니 드라마가 대부분이다.
드라마로 데뷔하기도 했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걷다보니 지금에 다다른 것 같아요. 대부분의 배우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서 오디션을 거쳐 선택받는 것인 만큼 드라마쪽에 기회가 많았던 것 같아요.
Q. 2년 전 연극 무대에서 봤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다.
무대와 카메라 앞이 얼마나 다를까, 뭔데 선배들은 저렇게 자연스럽고 자유로울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막상 해보니 연습기간이라든지 완성된 시나리오를 갖고 시작한다는 것 등 차이가 컸어요. 드라마는 몇 번 맞춰보고 바로 찍고, 마지막까지 결말을 할 수 없잖아요. 연극은 수십번 연습해 한 장면씩 완성한 뒤 정해진 큰 그림을 맞춰가고. 마음가짐은 같았지만 특성은 달랐어요.
크게 보자면 자신감이 생겼다고 할까. 연극 관객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무대를 집중해 바라보니까 예민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다 기억하세요. 어떤걸 시도하려 하면 금방 알아차리시죠. 그때 ‘조금이라도 집중을 잃으면 극 전체가 망가지는구나’ 하는 점과 유연성을 배웠어요. 연극배우들이 왜 카메라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순발력이 강한지를 깨닫고 진정성 있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Q. 보통 여배우들이 정점에 다다를 나이에 인지도가 급상승 하고 있는데.
앞으로 계속 치고 올라가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빨리 정상에 서고 싶다 하는 고민도 없었거요. 단지 저는 계속 연기가 하고 싶어요. 가슴이 뛰기 때문에 오랫동안 연기를 계속 해왔고, 포기할 생각도 없어요. 꾸준히 내가 연기를 할 수만 있다면, 어느 장소든 어느 시간이든 즐기며 연기를 할 수만 있다면 언제나 행복할 것 같아요. 욕심이 든다면 어떤 작품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