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8년 만에 하루 120만배럴 감산에 합의하면서 국제 유가가 급등하자 글로벌 경기 회복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2년간의 저유가에 ‘유가 상승=악재’라는 통념은 사라지고 오히려 유가 상승이 세계 경제의 저성장과 디플레이션에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 유가 전문가들은 배럴당 60달러를 ‘스위트 스폿(최적)’으로 보고 있다. 다만 가능성은 낮지만 유가가 80달러를 넘을 경우 오히려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유가 배럴당 50달러 중반선…60달러대 안착은 ‘험난’=OPEC의 감산 합의 소식에 미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내년 1월 인도분은 이날 뉴욕상업거래소에서 9.3% 급등하며 배럴당 49.44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북해산 브렌트유도 4달러 이상 오르며 배럴당 50달러를 넘어섰다. OPEC은 지난 10월 일평균 생산량보다 120만배럴 적은 3,250만배럴로 하루 생산량을 한정해 내년 1월부터 6개월간 시행하고 내년 5월 연장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OPEC 비회원국인 러시아도 감산에 나서는 등 산유국들이 8년 만에 감산 결정을 내려 당분간 국제 원유시장은 상승세를 보일 것으로 분석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가 전문가들을 인용해 OPEC 합의로 단기에 WTI 기준 59달러까지 가격이 오를 것으로 보면서 차익실현 물량 등에 가격 변동성이 큰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전했다. 일부에서는 이번 감산으로 유가가 배럴당 60달러를 넘어 70달러까지 뛸 수 있다고 전망하지만 배럴당 50달러로 손익 분기점을 낮춘 미 셰일 업체들이 멈췄던 생산시설 가동을 준비하고 있어 ‘50달러 중반선’이 평균 유가로 유력하다는 지적이다.
OPEC이 감산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치 않고 내년 초 감산을 앞두고 연말 물량 밀어내기도 예상돼 유가가 안정적으로 60달러대에 진입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UBS의 유가 전문가인 아트 카신 국장은 “OPEC이 합의에 성공했지만 이행은 또 완전히 다른 문제”라며 “러시아의 동참도 신뢰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유가 상승, 저성장·디플레 돌파구…중동 경제도 호재=한때 배럴당 100달러를 훌쩍 넘었던 유가가 20달러대로 추락한 후 여전히 40달러 수준에 머물자 저유가는 세계 경제 회복의 주요 장애물이 됐다. 유가 상승은 기업과 가계의 비용을 늘린다는 통념이 반세기 석유 경제의 구조화 속에 “저유가는 경기에 독이 된다”는 인식으로 바뀐 셈이다.
제프리 커리 골드만삭스 상품분석책임자는 “유가 상승이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고 라이언 토드 도이치증권 애널리스트는 세계 경제에 타격을 주지 않으면서 수요 증가를 이끌 수 있는 ‘골디락스(Goldilocks)’ 수준의 유가를 “배럴당 60달러 언저리”라고 밝혔다. 골디락스란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상적인 경제 상태를 말한다.
실제 유가 상승은 정체기인 미국 원유업계의 투자 확대를 이끌며 일자리와 임금 증가를 견인해 미국 경제 성장에 적잖은 도움이 될 것으로 WSJ는 기대했다. OPEC의 감산 합의가 무산되면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던 미 셰일 업체들의 주가는 이날 20~30% 폭등했다. 원유 컨설팅 업체인 우드맥켄지는 “잔뜩 눌려있던 셰일 업체들이 유가가 50달러를 넘으면 조심스럽게 생산을 늘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저유가에 신음해온 러시아와 브라질 등은 물론 허리띠를 조여온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들도 부채 감축과 정부 지출 확대에 나설 여력을 확보하게 됐다. 디플레이션 우려로 양적완화를 지속 중인 유럽연합(EU)과 일본은 물가에 기름값 상승을 불쏘시개로 활용할 수 있다. 미 상업은행인 브라운브러더스의 해리만 챈들러 통화전략부문장은 “유가 상승이 대다수 국가의 디플레이션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며 “일본의 경우도 가능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다만 OPEC 회원국이 과거 감산 합의를 지키지 않았던 사례들이 재발할 경우 불안정한 유가 급락을 초래해 오히려 세계 경제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뉴욕=손철 특파원 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