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경주지진을 계기로 수립 중인 지진방재종합대책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무용지물이 될 위기에 처했다. 한때 지진방재에 대한 커다란 관심이 불과 3개월 만에 급랭하면서 내년도 지진방재 예산 증액안이 90% 가까이 잘려나갔다. 이에 따라 조만간 발표할 지진방재 종합대책안의 상당 부분이 예산 증액을 전제로 짜여 졌다는 점에서 실효성이 크게 떨어질 전망이다.
4일 국민안전처에 따르면 국회는 지난 2일 내년도 예산안을 처리하면서 안전처가 요구했던 지진 방재관련 예산증액을 176억원만 승인했다. 애초 안전처는 국회 안전행정위원회를 거쳐 내년도 지진방재예산을 올해보다 1,525억원 증액할 계획이었지만 최종 단계에서 무려 88%(1,349억원)나 대폭 삭감됐다.
지진 관련 예산이 송두리째 잘려나간 것은 기획재정부가 난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기재부는 지방자치단체의 소방관서나 지자체 상황실 등의 내진보강 예산은 국가에서 줄 수 없다며 기본적으로 지자체 자체예산을 통해 처리돼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안전처가 추진하려던 지역 소방서와 재난 상황실의 내진보강 사업은 전면 백지화되고 말았다.
국민안전처 관계자는 “기재부는 지자체 소유의 공공건물은 기본적으로 지방예산으로 처리하라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며 “열악한 지자체 재정상황을 고려하면 각종 지자체 안전시설에 대한 내진보강은 미뤄질 수밖에 없다”고 아쉬워했다. 지난 9월 12일 경주에서 규모 5.8의 국내 사상 최대규모의 지진이 발생하면서 내진보강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들끓었지만, 예산 소관부처를 거치면서 불과 3개월 만에 마치 ‘옛일’로 치부되는 꼴이 되고 만 셈이다. 특히 이달 중순에 나올 지진방재종합대책도 결정적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국민안전처와 관련 부처는 경주 지진 이후 민간전문가 100여명과 공무원 등 200여명으로 구성된 지진방재대책개선 태스크포스(TF)를 통해 종합적인 방재계획을 짜고 있다. TF는 지난 3일 회의를 개최하고 활성단층연구, 내진보강, 지진관련 조직개편, 한국형 내진시스템 연구개발 등을 골자로 한 대책을 확정하고 조만간 발표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들이 추진되기 위해서는 내년도 지진방재 예산 증액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종합대책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유명무실화될 처지에 놓였다. TF를 이끌고 있는 김재관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내년도 지진방재 예산이 크게 증액되지 않으면 민·관 전문가 200여명이 밤낮없이 석달 가까이 만든 대부분 대책은 추진되지 못할 것”이라며 “내년의 경우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은데 과거 사례를 비춰볼 때 지진방재대책의 밑그림을 또다시 짜야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