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대통령실

선거의 여왕, 최초의 여성 대통령…최 게이트 46일만에 식물 대통령으로

[정치인생 최대 위기 맞은 박근혜 대통령, 정치 역경은]

승승장구 끝에 대통령 올라

임기 못채울 위기에 처하기까지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3년 2월 25일 최초의 여성 대통령, 최초의 부녀(父女) 대통령,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 최초의 독신 대통령이자 87년 체제 이후 최초로 과반 득표한 대통령으로 기록되며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러나 향후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인용할 경우 역시 최초로 탄핵으로 인해 임기를 채우지 못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게 된다.

박 대통령은 1998년 정치에 입문한 이후 보수정당을 살려낸 구세주,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며 그 누구보다 화려한 정치 경력을 쌓고 대통령이 됐지만 사적인 인연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인해 재임 중 피의자로 검찰에 입건되고 끝내 국회로부터 탄핵당하며 정치 인생의 마지막을 어둡게 장식하고 말았다.


◇군인의 딸로 태어나 퍼스트레이디 대행=박근혜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대구에서 박정희 육군 대령과 육영수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박근혜가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다니던 1961년 5월 16일 당시 육군 소장이던 박정희는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이 박정희뿐만 아니라 박근혜의 인생까지 송두리째 바꾸게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근혜는 대통령인 아버지와 함께 청와대에 살며 성심여중과 성심여고를 다녔다. 1970년엔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들어가 1974년에 졸업하고 곧장 프랑스로 건너가 남부 소도시인 그르노블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몇달 만인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 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저격당해 사망하자 급거 귀국해 영부인 역할을 대신 맡았다. 이것이 정계 입문 전 박근혜의 가장 중요한 경력인 ‘퍼스트레이디 대행’이다.

박근혜는 이 시기 최태민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네가 대통령이 된다’고 주입한 것도 최태민인 것으로 전해진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피격 사망으로 청와대를 나온 뒤에도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는 ‘미래의 대통령’이란 꿈을 버리지 않았다.


◇오랜 칩거 끝 정계진출…선거의 여왕이 되다=박근혜는 청와대를 나와 박정희의 유산 격인 사업들을 물려받았다. 육영재단과 영남대 이사장에 오른 것이 대표적이다. 최태민과 딸 최순실은 육영재단과 영남대 운영에 깊숙이 관여해 직원들과 교수들로부터 반발을 샀다. 이런 과정에서 박근혜는 동생들과 재단 권리 싸움을 벌이다 사이가 나빠졌고 결국 근령과 지만은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에게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보내 “언니가 최태민에게 속고 있으니 구해달라”고 호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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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199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이던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입당했다. 이듬해 4월에는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한다. 2000년엔 한나라당의 부총재가 됐지만 2002년 이회창을 비판하며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가 대선 전에 복귀했다. 독자세력화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 일로 박근혜는 배짱있는 대형 정치인으로 평가받게 된다. 방북해 김정일을 만난 것도 이 시기다.

박근혜가 보수의 구세주가 된 것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과 한나라당의 ‘차떼기 사건’을 계기로 한다. 박근혜는 2004년 3월 위기에 빠진 당을 위한 구원투수 격으로 당 대표에 올라 17대 총선을 지휘해 121석을 건지며 예상 외의 선전을 한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고 이명박, 손학규 등과 함께 차기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이명박에 이은 보수 대통령…뚜렷한 업적 없이 몰락=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은 정치인 박근혜에게 가장 큰 도전이었다. 당시 이명박은 최태민 일가가 관련된 의혹을 집중 폭로했다. 결국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에게 패했다. 그러나 박근혜는 이명박의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사실상의 차기 대통령’이라는 정치적 위치를 유지하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을 꺾고 대통령에 오른다.

박근혜 정부는 보수와 영남에서 나오는 ‘콘크리트 지지’를 발판 삼아 야심차게 출범했지만 대선 과정에서 국가 기관이 인터넷 댓글 등 광범위한 선거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작부터 소란스러웠다. 윤창중 사건과 같은 돌발 사건도 정권의 체면을 깎았다.

결정적인 위기는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침몰 사고다. 인명 구조 등 사고 대응에 총체적으로 실패한 것뿐만 아니라 청와대가 사고 당일 7시간 동안의 대통령 행적을 감추면서 의혹이 증폭돼 정권의 신뢰가 흔들렸다. 이듬해에는 메르스 대응에 실패했고 2016년에는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그동안 쌓인 국민적 분노가 일시에 폭발했다.

박근혜 정권은 ‘창조경제’ ‘문화융성’과 같이 모호한 국정 목표를 내세운 것도 문제로 지적받는다. 아직도 이 같은 목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른다. 이런 구호 아래 벌인 국가 단위 사업에서 최순실과 차은택 등이 사익을 취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박근혜 정권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맹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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