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급변하고 있다. 한 분야에서 1등을 한다고 안심하다가는 ‘한 방에 훅 가는’ 세상이다. 새로운 기술과 가치관이 나타나면서 서로의 영역이 파괴되고 있다. 그래서 혁신이 필요하다.
요즘 꼬마 아이들은 ‘디지털 카메라’를 뭐라고 부를까요? ‘디카’요? 아니요, 그냥 ‘카메라’로 부릅니다. ‘필름 카메라’를 본 적이 없으니 이 친구들에게 카메라의 원형은 바로 디지털 카메라인 겁니다. “안 봐도 비디오야.” 흔히들 쓰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비디오 플레이어를 못 보고 자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같은 뜻을 전하려면 ‘안 봐도 비디오’가 아니라 ‘안 봐도 MP4야’ 혹은 ‘안 봐도 유튜브야’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설픈 우스갯소리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다른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럴 때일수록 눈 앞의 나무만 볼 게 아니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전체 숲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주변의 작은 것들에 매몰되어 있다 보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이른바 ‘마케팅 근시안(Marketing Myopia)’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케팅 근시안은 1960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발표된 전 하버드대 교수 테드 레빗(Ted Levitt)의 논문 제목입니다. 제품 지향적 마인드가 아니라 고객 지향적 마인드를 통한 ‘가치 창출’이 중요하다는 게 논문의 요지입니다.
기차 산업을 예로 들어볼까요? 사람들이 기차를 타는 이유는 기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나 기차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닙니다. 먼 길을 가야 할 ‘운송수단’으로 기차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비행기가 나타나자 많은 고객들이 아무런 미련 없이 기차를 버리고 비행기를 택했습니다. 운송수단으로서 ‘더 빠르고 더 편리한’ 비행기의 매력이 컸던 까닭입니다. 기차라는 나무만 봐서는 비행기를 포함한 운송업이라는 숲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품이 아니라 고객 지향적인 마인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아울러 내가 몸담고 있는 비즈니스, 그 업(業)의 본질을 다시 살펴봐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업의 본질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내가 파는 게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예컨대 현대백화점은 더 이상 상품을 팔지 않습니다. 라이프스타일을 판다고 이야기합니다. 새로 바뀐 현대백화점의 로고를 들여다보면 백화점이라는 단어가 빠지고 현대라는 글자만 남았습니다. 고객이 꿈꾸는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안경이 아니라 패션을 판다며 “안경은 얼굴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안경전문점 룩옵티컬의 광고도 같은 맥락입니다. 가구업체 한샘은 가구가 아니라 ‘공간을 판다’고 이야기하며 교보문고는 책이 아니라 ‘책과 사람의 연결’이라는 경험을 판다고 말합니다. 커피를 파는 게 아니라 일터와 집 외에 제3의 공간을 제공하는 공간 비즈니스를 한다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스타벅스 사례는 이미 유명합니다.
최근 들어 화장품 회사들이 공장 견학 프로그램을 없앤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화장품 회사가 파는 것은 단순한 공산품이 아닙니다. 화장품 회사는 아름다움을 팝니다. 일종의 판타지입니다. 하지만 회색 빛 공장의 금속성 컨베이어벨트에서 만들어지는 화장품의 모습은 날 것 그대로의 현실입니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에 대한 고객의 판타지를 깨는 일인 겁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니 이제 경쟁은 기존의 동종 업계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이제 유통업의 경쟁 상대는 테마파크나 야구장”이라고 역설합니다. 쇼핑에 대한 행복한 경험을 팔겠다며 경기도 하남에 스타필드라는 초대형 쇼핑 콤플렉스를 열었습니다. 경쟁의 지형도가 달라지니 전선 또한 바뀝니다. “애플워치는 손목에 차는 작은 아이폰일 뿐이다. 사고 싶지 않다.” 스위스 명품시계 브랜드인 오메가를 이끄는 스티븐 우콰트 회장의 이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전에는 전혀 상관이 없던 애플과 오메가는 이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친, 이전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쟁자인 셈입니다.
이른바 ‘액체사회(Liquid Society)’의 한 단면입니다. 액체사회는 동종 업계 내의 경쟁뿐만 아니라 타 업종과의 경쟁 또한 치열해지면서 이른바 업종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액체처럼 용해되는 사회란 의미입니다. 이젠 누가 경쟁자인지도, 또 누가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어제는 어깨동무하고 의리를 외치던 동지가 오늘은 내 심장을 겨누어 비수를 날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액체사회에 정보기술(IT) 혁명이 덧붙으니 영역 파괴는 순식간입니다. 나이키는 더 이상 스포츠웨어나 운동화 회사가 아닙니다. 나이키 운동화에 나이키 플러스센서라는 소형 칩을 장착하면 하루에 얼마나 걷고 달렸는지 거리와 시간, 운동량 등의 데이터와 함께 그에 맞춘 다양한 건강 콘텐츠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인터넷은행도 그렇습니다. 인터넷은행을 주도하는 쪽은 기존의 금융권이 아니라 IT 업계입니다. 이른바 ‘○○페이’라고 이름 붙인
결제서비스들도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업종에서 들고 나왔습니다. 휴대전화 제조업체가 만든 삼성페이나 LG페이도 있고 IT 업체가 출시한 카카오페이, 네이버페이, 페이코도 있습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유통업체의 움직임도 활발합니다. SSG페이나 H월렛이 대표적입니다. 비즈니스 영역 파괴의 대표적인 현장입니다.
자동차와 IT의 영역 파괴도 있습니다. ‘스마트카’라는 게 나오면서부터입니다. 이제 자동차는 더 이상 탈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는 이제 ‘타고 다니는 인터넷’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동차 제조사들의 경쟁자를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애플로 규정한 맥킨지의 ‘2020 자동차 보고서’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바야흐로 액체사회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들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증기기관의 1차 산업혁명, 전기로 대표되는 2차 산업혁명을 거쳐 우리는 컴퓨터와 인터넷의 3차 산업혁명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혁명입니다.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드론, 로봇 등이 만들어낼 폭발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릴 일입니다. 나이키의 경쟁자는 닌텐도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 진짜 상대는 링 밖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링을 장악했다고 현실에 안주하다가는 링 밖에서 갑자기 날아온 불의의 일격에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모 자동차 회사 CF에 나오는 광고 카피를 들어볼까요. “마차로 가득했던 거리에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죠. ‘세상에 말 없는 마차라니 괴짜들이나 타겠군.’ 하지만 거리가 마차 대신 자동차로 가득해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3년. 새로운 시대는 늘 그렇게 한 순간에 찾아옵니다.”
그렇습니다. 잊어서는 안될 겁니다. 새로운 세상은 늘 그렇게 한 순간에 온다는 걸 말입니다. 닥치면 이미 늦은 겁니다. 세상의 변화에 안테나를 켜고 선제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혁신, 또 혁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안병민 대표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의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마케팅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