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생식독성물질 취급 근로자 인권실태]그녀에게 아이는 이룰수 없는 꿈…

전자부품·플라스틱 제조업체

女 27% 조산·사산 등 난임

피해 발생땐 산재인지도 몰라

유해물질 인과관계 증명 어려워

"산업안전법 개정 시급" 한목소리



# 40대 여성 A씨는 지난 1991∼1998년 국내 한 반도체 제조회사에서 제조공정(FAB) 오퍼레이터(조작자)로 근무했다.

그에게 있어 반도체 회사에서 보낸 7년여를 돌이키는 것은 고역이다. A씨는 당시 회사에 다니며 결혼을 하고 2세를 계획했지만 4년간 원인을 알 수 없는 유산과 난임을 반복하며 고통받았다. 어렵사리 시험관시술로 임신에 성공했지만 태아 염색체 이상으로 중절수술을 받게 됐다. A씨는 자신의 이 같은 고통은 반도체 제조회사에서 보낸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전자부품 제조업, 플라스틱·합성피혁 제조업 등 생식기능이나 태아 발육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독성·유해물질을 다루는 근로자 상당수가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한양대 의과대학과 함께 8월부터 약 한 달에 걸쳐 진행한 ‘생식독성물질 취급 근로자 인권실태조사 결과’를 21일 발표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기간에 톨루엔·와파린·항생제분진·전리방사선 등 생식독성물질에 노출된 한 병원의 여성 근로자 406명을 조사한 결과 27%가 난임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응답자 가운데 22.8%는 조산·사산·자연유산을 경험했고 20.2%는 월경에 이상이 있다고 대답했다.


생식독성물질이란 생식기능, 생식능력, 태아 발생·발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물질을 일컫는 말로 직접 노출된 개인뿐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다양한 건강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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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에 이상이 있었지만 생식독성물질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정도는 낮았다. ‘생식독성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26.6%에 불과했고 직장에서 생식독성과 관련한 안전보건자료나 정보를 받는다고 응답한 비율도 30%를 밑돌았다.

조사를 진행한 김인아 한양대 의과대 교수는 “생식독성물질로 인한 피해가 발생해도 그것이 산업재해에 해당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유해화학물질과 생식독성 발생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도 어려워 보상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생식독성물질에 대한 노출과 발생 질환 사이의 인과관계 증명이 매우 어려운 만큼 이를 완화하는 입법이나 해석론이 필요하다”며 “영국 산업재해 보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식처럼 생식독성물질에 노출되는 사업장에 근무한 경력이 있고(생식독성물질 사용기록은 남아 있어야 함) 해당 물질에 노출될 경우 발생하는 질환이 나타난 경우에는 의학적 관련성을 바로 추정해 보상하는 방법이 고려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근로자를 생식독성 유해인자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더욱 촘촘하게 산업안전법을 개정하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익명을 요청한 산업위생전문가 B씨는 “국내 산업안전법에서 관리하고 있는 물질은 국내 유통되고 있는 화학물질 중 극히 일부분”이라며 “지금 외국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발암물질) 프탈레이트 같은 것도 전혀 관리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여러 생식독성물질에 관해 산업위생전문가들이 관심이 있어도 결국 자본 자체가 사업주로부터 나오다 보니 그곳에서 원치 않으면 측정 자체가 불가하고 접근이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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