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 되자 경기도 평택시 지재교차로에는 작업복 입은 근로자들이 끝없이 몰려들었다. 근로자들이 지나는 골목마다 새로 짓고 있는 식당이 눈에 띄었다. 반도체 장비와 소재를 다루는 회사들이 입주할 건물도 곳곳에 올라가고 있었다. 이곳의 한 식당 주인은 “기존 식당으로는 근로자 수만 명을 다 수용할 수 없어 매일같이 새 식당이 세워진다”며 “지재교차로 일대는 평택의 새 번화가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산했던 지재교차로를 북적이게 만든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교차로 뒤편 고덕산업단지 2공구에 들어서자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회색빛 건물이 하늘을 떠받칠 듯이 서 있었다. 근로자들은 회색 건물에서 개미떼처럼 빠져나오고 있었다. 지난해 말 외벽공사를 거의 끝낸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가칭 18라인) 건설현장이었다.
지난해 말에 찾은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단지 18라인 건설현장에서는 거대한 노란색 크레인이 기자를 우선 맞이했다. 크레인은 반도체공장을 지탱하는 기둥을 블록 형태로 즉석에서 만들어 바로 옆 공사현장으로 나르기 위한 장비다. 건설현장의 한 관계자는 “과거 반도체공장은 블록 형태의 기둥을 멀리서 실어 날랐지만 이제는 현장에서 바로 만들어 수십m만 옮기면 되니 비용과 시간이 크게 줄어들었다”며 “삼성전자가 평택에 추가 투자를 결심한다면 신속하게 공장을 건설할 수 있는 공법으로 활용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평택 단지는 삼성의 반도체 미래를 이끌 새로운 심장부다. 축구장 5개를 합친 것보다도 길고 높이는 25층짜리 아파트와 맞먹는다. 단일 반도체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크기다. 18라인은 지금 본격적으로 장비 반입에 들어갔으며 상반기 안에 가동될 예정이다. 주요 생산품은 삼성전자가 세계에 자랑하는 첨단 메모리반도체인 3차원(3D) 낸드플래시다. 건설현장에서 만난 한 공사 관계자는 “삼성의 최고위층이 직접 현장을 둘러보며 완벽하면서도 안전한 공사를 주문하고 있다”며 “그만큼 삼성전자로서도 명운을 걸고 벌이는 중요한 사업”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18라인에 투입한 공사비는 15조6,000억원에 이르며 완공 후 직접고용 인원도 수천 명으로 예상된다. 평택시는 삼성전자가 추가로 건설할 생산기지를 더하면 평택 반도체단지 총 투자규모가 100조원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상주직원도 3만명을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D램·낸드 등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리는 삼성전자가 왕좌를 지키려고 던진 승부수인 셈이다.
평택 단지는 삼성만의 승부수에 그치지 않는다. 기존 주력산업의 활력 감소와 중국의 무서운 추격에 신음하는 한국 경제 전체를 봐도 평택은 중요한 돌파구다. 정부가 평택 단지의 원활한 가동을 돕기 위해 삼성전자 고덕산단 진입도로와 고속도로, 국도 연계 6개 노선, 진입 IC 등의 개통계획을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총투자 100조·직원 3만...4차 산업혁명 대비 조만간 2차 베팅
“조만간 발표될 삼성전자의 지난해 4·4분기 반도체 실적은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사상 최고치가 확실합니다. 이런 상승세는 올해도 죽 이어질 겁니다.”
최근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 실적에 대해 이같이 전했다. 이미 국내외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지난해 반도체 사업에서만도 13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거두고 올해는 18조5,000억원이 넘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비결은 반도체 경쟁의 핵심인 ‘시간싸움’에서 삼성전자가 때를 잘 맞춘 것이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반도체 호황 사이클에 맞춰 경기도 평택 반도체단지(고덕산업단지)의 1단계 투자(가칭 18라인)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는 의미다.
◇2단계도 곧 투자…반도체 호황기 확고히 틀어쥔다=삼성전자는 반도체 호황기가 장기화할 것으로 보고 언제든 평택 반도체단지에 추가 투자가 가능하도록 기반을 갖춰놓았다. 18라인 바로 앞에 설치한 가스케미칼동은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각종 산업가스를 공급하는 시설로 규모가 18라인 전체에 공급하고도 많이 남는 수준이다. 삼성전자 협력회사의 한 관계자는 “가스케미칼동은 삼성전자가 향후 2단계 투자를 고려해 두 공장에 골고루 가스를 공급할 정도의 용량으로 설계한 것으로 안다”며 “2단계 투자계획도 곧 발표되지 않겠냐”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스마트폰은 물론 인공지능(AI)·스마트카·스마트홈 등 반도체가 필요한 융복합산업들이 만개하면서 삼성전자의 반도체 실적이 상승일로를 달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가 지난해 11월 차량용 전자장비 업체인 미국의 하만인더스트리를 인수하면서 내후년부터는 차량용 메모리 매출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中 반도체굴기 무섭지만 시간은 아직 있어=물론 삼성전자의 앞길에는 반도체굴기를 내건 중국이라는 장애물이 놓여 있다. 미국 컨설팅사 베인앤컴퍼니는 중국의 반도체 투자가 앞으로 10년간 1,080억달러(약 119조4,500억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 기업들이 공격적으로 공장 건설과 시설투자에 나서면서 지난해 중국은 대만·한국에 이어 사상 첫 3대 반도체장비 소비국가로 우뚝 섰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기업이 구매한 반도체 장비는 67억달러(약 8조원)어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중국 기업들의 야심 찬 계획이 생각만큼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에 아직 시간이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중국 국유기업인 칭화유니그룹은 XMC와 통합해 중국 최대 반도체 제조사인 YMST를 출범시키고 미국 마이크론으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아 자체 D램 공장을 건설하려 했지만 아직 성사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XMC도 2018년 양산을 목표로 240억달러를 투자해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 3차원(3D) 낸드플래시와 D램 기지를 세운다고 발표했지만 아직 착공도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푸젠진화집적회로공사와 대만 UMC가 합작한 D램 공장이 지난해 7월께 건설을 시작한 상황이다.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이미 3D 낸드를 생산하고 있는 인텔의 다롄 기지와 푸젠을 제외하면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양산 일정은 계획보다 연기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