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운용자금을 유지했던 ‘1조 펀드(운용설정액 1조원 이상)’들도 불안한 시장전망에 안전자산 선호현상이 강화되며 자금유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수익률이 악화된 가치주 펀드를 중심으로 주식형 펀드들의 자금이탈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9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공모펀드 시장에서 설정액 1조원이 넘는 펀드의 총 설정액은 지난달 말 89조7,708억원으로 2년 만에 90조원 밑으로 내려갔다. 지난 2012년 초 70조원대에서 지난해 7월 한때 120조원을 넘어서는 등 대형펀드 전성시대를 맞았지만 시장 불확실성이 커지며 주식형에서 돈을 빼갔다.
설정액 1조원이 넘는 펀드 중 약 80%는 법인용 머니마켓펀드(MMF)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해 이들 MMF로는 8조2,000억원 이상 순유입됐지만 MMF가 아닌 1조 펀드들에서는 7,000억원 넘게 순유출됐다.
MMF를 제외하고 펀드별로는 운용설정액 1조원이 넘는 10개 공모펀드 가운데 6개 주식형 펀드에서 모두 자금이 빠졌다. ‘한국밸류10년투자(-3,796억원)’ ‘메리츠코리아(-3,225억원)’ ‘KB밸류포커스(3,213억원)’ 등이 가장 많은 자금 유출을 기록했다. 이들 펀드는 지난 한 해 -2%에서 -20%대까지 수익률이 추락하며 투자자들의 이탈이 이어졌다. 패밀리펀드 설정 규모가 3조원에 육박하는 ‘신영밸류고배당’도 지난해 수익률이 2%대에 그치며 1,012억원이 빠져나갔다.
반면 1조원이 넘는 펀드 중 4개 채권형 펀드는 모두 자금이 유입됐다. 글로벌 채권펀드인 ‘미래에셋글로벌다이나믹’과 ‘미래에셋글로벌다이나믹플러스’가 각각 3,264억원, 7,245억원을 모았다. 국공채펀드인 ‘한화단기국공채’로도 4,630억원이 몰렸다. 지난 한 해 투자자들이 안정성을 찾아 채권으로 몰려든 덕분이다.
다만 올해는 1조원이 넘는 채권형 펀드도 자금유출을 막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의 당선 이후 채권시장이 악화되면서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올해 전 세계 금융투자 시장의 대세로 ‘그레이트 로테이션(채권에서 주식으로의 대규모 자금 이동)’을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다만 흔들리는 시장에서 신중한 접근을 조언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미래에셋글로벌다이나믹’ 펀드를 운용하는 김진하 미래에셋자산운용 상무는 “트럼프 효과가 실제로 나타나려면 아직 수개월이 걸릴 텐데 시장이 이를 너무 일찍 반영했다”고 분석했다.
가치주 펀드들은 올해 ‘반등의 모멘텀’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지난해 대형주 장세 속에서 가치주가 부진했지만 금리·물가 인상기를 맞아 강세를 보일 것이라는 분석 때문이다. 오현석 삼성증권 투자전략센터장은 “시장이 불확실한 시기에는 성장주보다 가치주가 더 빛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