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과 무역 분야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부르짖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오는 20일 취임하면 보호무역 기조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대기업들은 이 같은 ‘트럼프 탠트럼(tantrum·발작)’에 대비해 아예 현지 생산공장을 인수하거나 다른 국가에서의 생산물량을 줄이고 미국 현지에 생산 라인을 새로 짓는 방안까지 추진하고 있다. 더욱이 주요2개국(G2)인 미국과 중국이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경제패권 전쟁을 본격화하고 있어 한국기업들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고립무원 상태로 내몰리고 있는 모양새다.
재계에서는 얽히고설킨 무역갈등을 해결할 ‘통상 컨트롤타워’를 조속히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 탠트럼에 노이로제 걸린 기업들=미국 수출 비중이 큰 대기업들이 ‘트럼프 포비아(공포증)’ 증상을 호소하고 있다. 9일 10대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당선인이 중국과 멕시코에서 생산돼 미국 본토에 수입되는 제품들에 대해 35% 이상의 고율관세 부과를 경고한 상태”라며 “생산·판매·유통·광고 등 미국시장과 관련된 경영전략을 다시 수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아제강이 대표적이다. 미국이 한국산 철강에 대해 관세장벽을 높이자 급기야 미국 현지에 생산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세아제강은 최근 미국 휴스턴 현지 강관기업이 보유한 유정용 강관설비를 아예 인수하기로 했다. 높은 관세를 부담하고 미국에 수출하는 것보다는 현지에서 생산하는 것이 비용절감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 포스코는 미국 정부로부터 냉연강판에 대해 64.68%의 반덤핑과 상계관세를 판정받았고 현대제철도 38.24%의 관세를 얻어맞았다.
포스코의 열연강판 대미 수출은 현재 중단된 상태이고 냉연강판은 기존에 계약이 이뤄진 건에 대해서만 일부 물량을 수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가전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생산전략을 다시 짜고 있다. 제너럴모터스(GM)·포드와 같은 미국 자동차는 물론 도요타 등 해외기업에 대해서도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는 트럼프 당선인이 예리한 ‘통상 칼날’을 한국기업으로 돌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서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미국 현지에 생산공장을 짓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세제혜택이 좋은 후보지를 물색하고 있고 공장 규모와 생산품목에 대해서도 내부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실제 미국 상무부는 지난해 12월 중국에서 생산돼 미국으로 수출되는 삼성과 LG전자 세탁기에 각각 52.5%, 32.3%의 반덤핑 예비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한국 세탁기에 대해 제동을 걸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삼성의 한 고위 관계자는 “미국의 여러 후보지를 놓고 조율하고 있는 상태”라며 “트럼프 당선인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을 천명하고 있어 어떠한 형태로든 사전정지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G2 통상마찰 유탄에 대기업 비명=글로벌 경제패권을 장악하려는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에 돌입하면서 우리 기업들이 유탄을 맞고 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같은 정치·외교이슈까지 더해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게 되면 우리도 영향권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미국과 한국이 배치하려는 사드에 대해 노골적으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우리 기업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과 중국이 서로 상대방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애꿎은 한국기업을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며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정부가 멍하니 있지 말고 통상 컨트롤타워를 만들어 G2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기아차는 발등의 불이 떨어진 상태다. 트럼프 당선인이 포드·GM 등 글로벌 완성차 회사를 대상으로 토해내는 압박 강도가 갈수록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피아트크라이슬러가 8일(현지기간) 미 중서부에 있는 공장 2곳의 현대화를 위해 3년간 10억달러(약 1조2,026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이 같은 흐름의 연장선상이다.
완성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트럼프 당선인은 일본 도요타가 멕시코에 새로 공장을 짓는 것에 대해 국경세를 물어야 한다고 압박하지 않았느냐”며 “글로벌 거점을 확대하고 있는 국내 완성차 회사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중국 정부는 사드 문제를 연결고리로 우리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롯데그룹 세무조사 △한국산 배터리 장착 차량에 대한 보조금 금지 △한국산 폴리실리콘에 대한 반덤핑관세 △전세기 운항 금지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중국이 한국을 겨냥해 통상압력을 강화하자 유럽연합(EU)과 인도·태국 등 신흥국도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맹공을 퍼붓고 있다. EU는 한국산 경량 감열지에 대해 잠정 반덤핑관세를 부과했고 태국은 철강, 인도는 톨루엔디이소시아네이트(TDI)에 대해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거나 조사에 들어갔다.
/서정명·한재영기자 vicsj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