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귀국 후 일단은 기존 정당과 거리를 둔 채 대선 행보에 돌입하면서 그의 이념 성향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높아지고 있다. 반 전 총장은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한 가운데 그의 귀국 연설과 매체 인터뷰 등을 종합해보면 ‘경제는 중도·개혁, 안보는 보수’에 가까운 시각을 가진 것으로 분석된다. 김종인·손학규 등 제3지대 인사는 물론 바른정당·국민의당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세력과 언제든 연대가 가능하도록 정치적 스펙트럼을 한껏 넓혀놓은 셈이다.
반 전 총장은 귀국 후 밝힌 대국민 메시지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전쟁의 참화를 통해서 우리의 안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꼈고 또 이런 것이 국민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몸소 터득했다”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를 지지하며 한미 동맹이 가장 중요한 방위 축인데 이미 합의된 것을 재논의하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반면 경제 이슈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원론적인 수준의 입장만 내놓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진보’의 라벨을 붙여도 무방할 만큼 개혁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반 전 총장은 “나라는 갈가리 찢어지고 경제는 활력을 잃고 사회는 부조리와 부정으로 얼룩졌다”며 “부의 양극화와 이념·지역·세대 갈등을 끝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는 “재벌의 영향이 너무 크니까 중소기업이 살아날 길이 없다. 노동자도 하도급에서는 똑같은 일을 하는데 60%만 임금을 받으면 그게 불공평한 사회”라며 “원칙적으로 재벌 개혁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 전 총장의 캠프와 조력자 그룹에도 온건 보수로 분류되는 이상일·박진 전 의원과 포용적 성장을 기반으로 한 ‘따뜻한 경제’를 강조하는 곽승준 고려대 교수 등이 포진해 있다. 타국에서 자문 역할을 담당할 제프리 색스 컬럼비아대 교수도 부의 불평등 문제에 관심이 많은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김윤철 경희대 교수는 “이념을 똑 부러지게 규정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며 “이명박 전 대통령과 비슷하게 무(無)이념·실용주의와 유사한 노선을 걷겠다는 전략을 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반 전 총장이 여러 발언을 통해 ‘외교·안보는 보수, 경제는 중도’라는 점을 직간접적으로 규정한 상태”라며 “이념적으로만 보면 유승민·김종인·손학규 등과 연대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그림”이라고 해석했다.
반면 여야 의원들 사이에서는 반 전 총장의 이념 지향에 대한 평가가 극명히 엇갈리는 모습이다.
반 전 총장의 측근인 성일종 새누리당 의원은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경제 분야에서는 진보적으로 약자나 중소기업을 끌어안으려고 하고 있다”면서도 “반 전 총장은 진보·보수 이런 걸 안 따지고 실용적 개념으로 접근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특정한 이념 틀에 가둘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도 이날 기자들과 만나 “새로운 정치를 하자는 원론적인 수준의 말씀으로 이해한다”면서도 “저성장·양극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라면 동의한다”고 말했다.
반면 정치학 박사 출신이자 친노 성향인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보수에 대한 국민 인식이 워낙 안 좋으니까 ‘진보적’이라는 수식어로 포장한 것일 뿐”이라며 “수식어를 빼고 나면 결국 그가 보수주의자라는 사실만 남는다”고 폄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