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70년간 미국과 끈끈한 결속을 자랑했던 독일·프랑스가 오는 20일 미국 제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에 반발하며 ‘유럽의 독자노선’을 선언하고 나섰다. 영국도 이란 핵합의를 두고 트럼프 당선인과 마찰을 빚는 등 대서양을 사이에 둔 이들 국가의 단단한 동맹 축을 버팀목 삼았던 전후체제가 극도로 불확실한 미래로 떠밀려가고 있다.
16일(현지시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우리 유럽인들은 우리 자신의 손에 운명이 달렸다”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쓸모없고 유럽연합(EU)은 독일의 도구’라고 발언한 트럼프 당선인을 비판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어 “EU는 경제력과 효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통해 테러리즘과 디지털화, 그 밖의 다른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다”며 “나는 27개 회원국이 강고하게, 무엇보다도 낙관적으로 함께 일해나가는 것에 지금처럼 앞으로도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도 당선인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EU는 외부 충고가 필요 없다”며 메르켈 총리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는 이날 제인 하틀리 주프랑스 미국 대사의 이임행사에서 “유럽은 언제나 대서양 건너편(미국)의 협력을 추구하겠다”면서도 “유럽의 이익과 가치에 기반을 둬 그 길을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박해받는 이들에게 망명지를 제공하는 원칙은 유럽과 미국인이 공유한 핵심 가치”라며 “나토는 각종 위협이 시대에 뒤질 때만 시대에 뒤진 틀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유럽 대륙에서 미국의 오랜 우방국인 두 국가의 정상이 입을 모아 차기 미국 대통령에게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이번 일은 지극히 이례적이라는 것이 외교가의 분석이다.
유럽 주요국들의 격한 반응은 지난해 11월 미 대선 이후 유지해왔던 유보적 입장을 철회하는 신호로도 읽힌다. 그간 프랑스와 독일은 차기 미국 행정부가 내놓을 외교정책 가이드라인을 기다리며 직접적인 논평을 삼가왔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의 개방적 난민정책을 재앙에 비교하고 EU의 존재가치를 폄훼한 트럼프의 발언에 충격을 받은 유럽 주요국에서는 격앙된 반응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지그마어 가브리엘 독일 부총리 겸 경제부 장관은 유럽으로 쏟아지는 중동 지역 난민들에 대해 “미국이 주도한 전쟁의 결과”라며 트럼프의 발언을 정면 반박했다. 장마르크 에로 프랑스 외교부 장관도 “최선의 대응은 유럽의 결속이며 유럽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통합하고 EU 안에 남아 있는 것”이라며 각을 세웠다.
심지어 트럼프 당선인과 상대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맺은 영국도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서는 분위기다. 지난 2015년 7월 타결한 이란과 P5+1(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독일)·EU의 핵합의안 때문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해당 합의를 최악으로 평가하며 대이란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고 발언했지만 보리스 존슨 영국 외무장관은 “어렵고 논쟁적인 합의였지만 이란이 핵무기 기술을 확보하는 것을 막은 합의였다”며 반발했다.
전후 두 대륙을 뭉치게 했던 미국과 유럽 주요국과의 관계가 트럼프의 등장으로 빨간불이 켜지면서 본격적인 ‘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문제의 발언들을 두고 “전후 질서의 기둥을 흔드는 (트럼프의) 근육 자랑”이라며 “유럽 외교가는 2차대전 종전 이후 최초로 유럽 분열을 부추기는 미국 대통령을 마주하게 됐다”고 우려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유럽에서 오랜 동맹과 사이가 틀어진 트럼프가 아시아에서는 ‘하나의 중국’ 원칙으로 중국과 마찰을 빚은 것을 두고 “트럼프 시대가 오면서 불확실성이 세계를 휘감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