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마다 부산에 있는 처가를 찾는 조해성(41)씨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반가운 마음을 안고 가지만 보수적인 장인어른(79)으로부터 종일 월남전 참전과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 이야기를 매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설에는 장인어른과 모처럼 즐거운 밥상 대화를 나눴다.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최씨에게 호통친 특검 사무실 청소 아주머니의 ‘염병하네’ 일침은 온 가족에게 함박웃음을 줬다고 했다.
조씨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명절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며 “처가에서 정치 대화를 주고받은 것은 처음”이라 말했다.
30일 나흘간의 설 연휴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귀경객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최순실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건이 설날 밥상을 장악했다.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최씨에 대한 성토가 명절 대화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부모·자식 세대와 친지들이 정치 성향을 넘어 국정농단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세대 간 틈새를 줄이는 명절이 됐다는 반응도 흘러나왔다.
“가족·친지들 공감대 형성
세대간 틈새 줄이는 명절”
“하루빨리 정상화” 지적도
경남에 있는 부모님 댁을 찾은 직장인 고흥봉(38)씨는 “친지들의 정치 성향이 제각각이어서 지금까지 정치 얘기는 자제했는데 이번 설에는 최순실 사건을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것은 물론 집안 어른들까지 하나같이 비판적인 반응을 보여 놀랐다”고 말했다.
또 강원도 인제에서 설을 보낸 김장영(48)씨는 설날 가족모임에서 나눈 얘기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지금껏 가족모임에서 정치 얘기가 나올라치면 아버지의 ‘어허~ 쓸데없는 소리’라는 한마디에 쑥 들어가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여든을 넘긴 아버지가 갑자기 “최순실 때문에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라며 포문을 열자 가족들이 일제히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치며 한바탕 시끌벅적한 시국 토론회를 벌였다. 김씨는 “평생 농사만 지어오신 탓에 아버지도 여느 어르신들처럼 보수적인데 현직 대통령에 대해 그처럼 비판하는 것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주부 최윤희(41)씨는 설 연휴에 포항(시댁)과 논산(친정)을 오가며 국정농단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몸소 느꼈다. 최씨는 “경상도와 충청도에서도 대통령의 무능과 최씨의 과욕이 만들어낸 국정농단 사태는 한 편의 소설이라고 비판했다”며 “이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버티는 대통령과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최씨가 많이 닮았다는 목소리도 많았다”고 꼬집었다.
부부간 ‘정치 변심’에 멋쩍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충남 아산에서 차례를 지낸 김형민(41)씨는 평소와 다른 부모님의 모습을 봤다. 김씨는 “은퇴 공무원인 아버지의 경우 평생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해왔는데 이젠 완전히 돌아섰다”며 “여전히 박 대통령을 믿고 있는 어머니와 ‘정치 결별’을 선언해 가족들이 다들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했다”고 놀라워했다.
직무정지 중인 박 대통령이 설날 민심을 겨냥해 진행한 최근 한 인터넷방송과의 인터뷰에 대한 비판도 터져 나왔다. 서울에서 차례를 지낸 주부 양희정(32)씨는 “(대통령) 자신은 결백하다고 하는데 기존 인터뷰와는 달라 또 말 바꾸기를 한 것”이라며 “아직도 반성하지 못하고 있는 대통령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는 친지들이 상당수였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설을 맞은 손모(57)씨도 “국정농단 사건이 장기화하면서 가족 중에서는 지친다는 얘기도 나왔다”며 “헌법재판소가 하루빨리 결정을 내려 국가 통치 시스템이 정상화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한영일기자·전국종합 hanu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