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법과 권력, 경제…에드워드 코크



법과 권력. 어느 것이 우위일까. 당연히 전자(前者)다. 법을 지키지 않는 리더가 있다면 혼군(昏君)에 다름 아니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현대 국가치고 ‘법의 우위’가 확립되지 않은 나라는 없다. 하지만 예전에도 그랬을까. 더욱이 시간을 400년 거슬러 올라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절대군주의 시대였으니까. ‘왕의 권력은 신이 부여했다’는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는 군주의 턱밑에서 ‘왕권보다 법이 우선’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에드워드 코크(Sir Edward Coke). 법과 정치는 물론 경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552년 2월1일 영국 중상류 집안에서 태어난 코크는 순탄한 길을 걸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고 젊은 시절부터 정치인으로, 법률가로 이름을 날렸다.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는 42세에 법무장관까지 올랐다.(이 자리를 놓고 코크는 9살 아래인 프란시스 베이컨과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베이컨은 평생토록 그의 라이벌이었다). 장관직을 마치고 민사법원장, 왕실법원 수석판사(대법관)로 봉직했던 그가 남긴 대표적인 판결은 두 가지. 보넘 사건(Dr. Bonham Case)과 국왕 제임스 1세가 관련된 소송 사건이다.

국왕과 관련된 사건부터 보자. 발단은 리치필드의 한 주교가 1616년 제임스 1세를 상대로 낸 소송. 국왕이 약속했던 성직록(聖職祿·commendam)을 지급하라는 소송이었다. 제임스 1세는 혐의를 부인하며 법무장관인 프란시스 베이컨을 통해 압력도 행사했다. 국왕의 요구는 판결 연기. 자신이 판사들과 면담할 때까지 재판을 연기하라고 보챘다. 왕실법원 수석판사인 코크는 듣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왕의 요구는 불법’이라는 편지를 대법관들에게 돌렸다. 왕은 결국 패소했다.

분노한 제임스 1세는 대법관들을 불러들여 판결 취소 명령을 내렸다. 제임스 1세가 어떤 인물이던가. 1609년 의회에서 “왕은 마땅히 신이라고 불려야 한다. 지상에서 왕은 신권과 같은 권력을 부여받았다”고 연설했던 왕권신수설의 신봉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 동료들과 달리 코크는 “법관의 임무를 수행할 뿐”이라며 버텼다. 제임스 1세는 코크를 쫓아냈다. 온갖 ‘혐의’도 만들어냈다. 코크가 무려 1만2,000파운드(요즘 가치 754.1만 파운드=원화 약 109억원·물가상승률 기준)를 횡령했다는 올가미를 씌웠다. 권력은 코크를 만신창이(滿身瘡痍)로 만들었어도 시민들은 성원을 보냈다. 재판관이 군주의 절대 권력에 맞선 사례를 남긴 코크는 ‘영국법의 수호자’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제임스 1세는 코크에게 미안했는지 하원 의원 자리에 앉혔다. 실은 코크와 제임스 1세는 애증이 섞인 관계였다. 자손을 남기지 못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계자로 지목한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를 영국 왕 제임스 1세로 모셔오는데 코크 부부가 적지 않은 역할을 맡았다. 제임스 1세가 코크에게 기사 작위를 하사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국왕은 코크가 법관으로 못다 한 충성을 의원으로서 바치기를 기대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코크는 법관이나 정치인은 법을 수호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하원의원과 대변인, 의장 대리 등 요직을 거친 말년의 코크는 힘을 다해 대작을 만들어냈다. 만 76세의 나이에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 작성을 주도한 것. 영국의 명재상이라는 윌리엄 피트가 ‘대헌장, 권리장전과 함께 영국법의 바이블’이라고 극찬한 권리청원은 ‘법에 의해 보호받는 국민의 권리’를 핵심 내용으로 담았다. 선왕인 제임스 1세 이상으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의회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국왕 찰스 1세는 의회의 청원을 3개월 동안 만지작거리다 마지못해 서명하고 말았다. 억지로 짜낸 세금(건함세)으로도 스페인과의 전쟁비용을 감당할 수 없자 돈이 필요해 의회를 소집하고 요구를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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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크는 권리청원의 핵심 내용을 제1조에 못 박았다.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걷을 수 없다’는 대헌장(1215년)의 내용이 재확인된 것이다. 코크는 진작부터 연구해온 대헌장이 일부 귀족과 자유민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국 국민 전체에게 고대로부터 내려온 ‘자연법’이라고 해석했다. 대헌장조차 인위적인 이성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이성의 결과인 자연법(보통법·불문법)의 일부일 뿐이라는 코크의 생각은 정치사에 굵은 흔적을 남겼다. 당장 국민들의 의식 수준은 높아진 반면 권리청원을 지키지 않은 찰스 1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국왕까지 참수한 영국 내란(청교도 혁명)에는 옛적부터 보장된 권리에 대해 침해받지 않겠다는 코크의 사상이 깔려 있다.

미국은 영국보다 코크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코크의 대표 저작인 ‘영국법 제요(英國法 提要·Institutes of the Laws of England)’는 아메리카 식민지 법률 체제의 모든 것이었다. 조지형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의 연구 논문 ‘적법절차의 발전과 대서양 세계의 법 문화’에 따르면 미국 독립 이전 아메리카 식민지의 법원 판결 중에 기록으로 남은 228개 판결 가운데 코크의 ‘영국법 제요’는 무려 294회나 판결 근거로 쓰였다. 코크가 기초한 권리청원의 정신은 식민지인들에게 ‘정당한 항거’를 넘어 독립전쟁의 명분으로 자리 잡았다. 코크가 강조한 ‘적법절차’는 미국 대법원에 의해 ‘사법부의 우위’와 ‘위헌 심사’ 기능으로 이어졌다. 탄핵 재판의 뿌리를 코크로 보는 시각도 있다.

코크는 자본주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임스 1세에 대한 소송과 더불어 2대 판결로 꼽히는 보넘 사건이 반독점 판결의 시조 격이다. 민사법원 재판장 시절인 1610년 발생한 사건의 개요는 의과대학과 개업의사 간 면허권 분쟁. 의사면허증 발급 권한을 가진 런던의 전문 의과대학이 케임브리지 출신 개업의 보넘 박사에게 벌금을 매기고 대학 감옥에 가두며 소송전으로 번졌다. 주심을 맡은 코크는 ‘대학의 면허 발급권은 인정하지만 유능한 의사임이 분명한 자의 생계활동 자유 박탈은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길드의 하나인 대학의 독점적 지위를 부인한 판결은 자유경쟁을 촉발시켰다.

미국의 경제사가 겸 투자분석가인 윌리엄 번스타인은 명저 ‘부의 탄생’에서 세계 경제 성장에 대한 코크의 기여를 두 가지로 꼽는다. 자유경쟁을 유발했으며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자본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코크가 영향을 끼친 자유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재산권이 존중받는 세계는 1790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과 미국, 스위스 세 나라에 불과했으나 1990년에는 61개국으로 불어났다. 지구촌 경제도 이런 추세를 타고 급속한 성장 가도를 달렸다.

영어권을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법관이라는 에드워드 코크가 남긴 유산을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지 자신이 안 선다. 왕조 시대도 아니건만 ‘법의 우위’나 ‘원칙’을 아예 모르는 듯한 지도자가 적지 않다. 우리에게도 코크 같은 법관이 많았으면 좋겠다. 자신을 임명하고 작위까지 내려준 국왕보다 법을 우선으로 여긴 코크처럼 법과 원칙에 충실한 법관이 그래도 많다고 믿는다. 시민과 사회도 마찬가지다. 굳이 실정법을 따르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양심과 이성, 정의가 살아 있다면, 세상이 이리도 혼용무도(昏庸無道)할까. 코크가 그토록 수호하려 애쓴 보통법은 바로 여기에 근거한다. 정의와 이성(justice and reason). 굳건한 경제, 지속적인 성장과 개개인의 풍요로운 삶도 이런 바탕에서만 가능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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