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불출마를 전격 선언한 데는 정치권에 대한 회의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반 전 총장은 귀국과 함께 국내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기 위해 여야 정치권 인사들과 잦은 접촉을 해 왔다. 하지만 하나같이 희망보다는 절망과 환멸을 느끼게 하는 말과 태도를 보인 데 대해 크게 실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 전 총장의 참모 역할을 했던 이상일 전 의원은 2일 ‘반 전 총장의 대선 불출마를 안타까워하며’라는 글을 통해 “반 전 총장이 정치교체의 뜻을 접은 건 우리 정치 풍토, 기성 정치인들의 행태에 절망했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반 전 총장은 지난 1일 불출마 기자회견에서도 ‘일부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와 각종 가짜 뉴스’ 등을 불출마 배경으로 꼽았다.
이 전 의원에 따르면 반 전 총장은 불출마 기자회견 후 참모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정치인들의 눈에서 사람을 미워하는 게 보이더라”, “정치인들 중에 마음을 비우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더라”, “정치는 꾼에게 맡기라도 하더라. 당신은 꾼이 아닌데 왜 왔느냐고 하더라”, “정치란 정말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등 정치권에 대한 절망과 환멸을 심각하게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 전 총장을 가까이서 지켜봐 온 이 전 의원은 “몇몇 유력하고 유명한 정치인의 말과 태도는 반 전 총장을 만났을 때와 밖에 나와 언론을 통해 얘기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며 “그들의 계산은 자기를 뽐내고, 자기의 주가만을 올리는 데 있었다. 그들은 자기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반 전 총장의 체면을 깎아 내리고, 반 전 총장에게 모멸감을 주는 말들을 서슴없이 뱉었다”고 지적했다.
평생 외교관으로 살아온 반 전 총장이 ‘유력 정치인’들이 내뱉는 모멸감 섞인 말을 쉽게 받아 넘기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반 전 총장의 ‘정치적 맷집’이 약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오지만, 정치권의 구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현역 의원들 사이에서도 나왔다. 김성태 바른정당 의원은 반 전 총장의 불출마 발표 직후 “우리 정치가 인물을 키워내지는 못할망정, 반 총장 같은 큰 인물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각박한 풍토에 물들고 있다”며 “그릇의 크기나 됨됨이를 따지기보다 미국 대선에서 나타난 것처럼 원초적인 인기영합주의로 흘러가는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전날 반 전 총장과 회동 자리에서 “사람들이 저를 두고 보수주의자라고 했다가, 진보주의라고 했다가, 중도보수라고 했다. 그러다 최근에는 ‘낙상주의’로 바꿨다”며 “나이가 들어 미끄러져 낙상하면 큰일이다. 특히 겨울엔 미끄러워서 여기저기 다니면 낙상하기 쉬워 집에 가만히 있는 게 좋다”는 농담을 던졌다. 듣기에 따라 반 전 총장이 보수도 진보도 아닌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여야 인사들을 만나 ‘제3지대’를 추구하는 것을 두고 ‘낙상’과 비슷한 ‘낙마’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인 위원장이 지적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이에 반 전 총장은 “허허” 웃으며 “알겠습니다”라고 받아넘기는 미묘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이상일 전 의원은 “우리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몇몇 유력 정치인들의 표리부동하고 위선적인 태도에 반 전 총장은 환멸을 느꼈을 것”이라며 “근거도 없는 허위사실과 가짜뉴스를 활용하면서 그를 공격하는 정치권 인사들의 야비함에도 절망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반 전 총장의 귀국과 함께 불거진 23만불 수수의혹과 신천지 연루설, 그리고 ‘턱받이’·‘퇴주잔’ 논란 등에 휩싸여 왔다. 반 전 총장의 행보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거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인냥 논란으로 둔갑한 데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반 전 총장의 이 같은 불만과 답답함은 불출마 선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반 전 총장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 각종 가짜뉴스로 인해서 정치교체 명분은 실종되면서 오히려 저 개인과 가족, 그리고 제가 10년을 봉직했던 유엔의 명예에 큰 상처만 남겼다”며 가짜뉴스를 불출마 사유 중 하나로 꼽은 바 있다.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는 2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반 전 총장과 관련한 나쁜 뉴스 중 7∼8건이 무려 가짜뉴스였다는 보고도 있다”며 “바른정당이 중심이 돼서 가짜뉴스의 생산과 유통을 막는 법적 정비를 하겠다”고 말했다. 주 원내대표는 이어 “‘가짜뉴스’의 폐해가 매우 심각하다”며 “마치 언론사가 취재한 정확한 뉴스인 것처럼 형태를 포장하지만 그 내용은 가짜”라고 덧붙였다.
이 전 의원은 소설 ‘주홍글씨’를 인용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unpardonable sin)은 다른 사람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하는 일”이라며 “몇몇 유력 정치인이나 정당 관계자들, 진영논리에 빠져서 진실과 사실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한 행동은 반 전 총장의 ‘순수한 마음의 성역’을 침범하고 손상하는 것이었다”고 꼬집었다. 그는 “그들은 그들에게 질린 반 전 총장의 퇴장에 환호성을 지를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저지른 언행은 그들의 양심에도 가책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반 전 총장의 도전은 실패했지만 ‘정치를 교체하겠다’, ‘권력 독식을 막고 분권과 협치의 틀을 마련하는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순수했다”며 “그런 순수하고 소박한 뜻을 기성 정치권에 속한 여러 정치인들이 왜곡하고 폄하했지만 반 전 총장과 함께 일한 이들, 그를 지지했던 분들의 마음속엔 ‘그것이 옳은 길’로 남아 있다. 반 전 총장은 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정치교체의 씨’를 뿌린 것”이라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이 귀국 후 정치권을 어떤 식으로 바라봐 왔는지 측근 참모를 통해 알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반 전 총장도 이날 정치권 인사들을 ‘우물안 개구리’에 빗대 비판을 숨기지 않았다. 반 전 총장은 사당동 자택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불출마 결정의 계기에 대해 “3주간 정치인을 만나보니까 그분들 생각이 모두 다르고 한 군데 끌어모아서 대통합을 이루는 게 어렵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시간을 소비하기엔 내가 상당히 힘에 부치고 시간은 제약이 있고 여러 가지 현실적 어려움이 있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반 전 총장은 “지난 해 12월 하순부터는 여러 가지로 고뇌를 많이 했다”며 “그런데 우리 사회가 이렇게 해서 되겠느냐. 왜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일종의 우물안 개구리 같은 (생각을 하나)”라고 지적했다.
반 전 총장은 “우물 안에서 하늘 보면 얼마나 보겠나. 그러나 바깥에서 한국을 보면 너무 적나라하게 문제점이 보인다”며 “그러나 사람들이 못 보고,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못 보고 계속 내정에만 매몰돼 있다”며 국내 정치권의 행태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반 전 총장은 또 “‘정치는 정치꾼에게 맡겨놔라’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마포의 한 중식당에서 참모진과 오찬 후 기자들과 만나 “정치는 모든 국민에게 다 열려야 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반 전 총장은 “정치는 과학이 아니다. 과학계에는 제가 감히 들어간다고 얘기 못 하지만, 정치는 어떤 국민이든 참정권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치사회에서는 ‘정치는 이런 것이다. 정치는 꾼이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를 특정한 배타적 지역으로 만들어놓고 자기들끼리 한다”면서 “이런 건 정치가 아니다”라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또 “어떤 개별적 잘못을, 흠결을 끄집어내는 데 거의 혈안이 된 듯한 그런 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 같은 분위기가 “자자손손 대대로 갈 때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 자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공직자 출신으로, 특히 외교관 출신으로 이제까지 대권에 도전한 사람이 없었다”면서 “차라리 일찍 꿈을 접고 저보다 더 훌륭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꿈을 접게 된 것”이라는 소회도 밝혔다.
앞서 반 전 총장은 이날 오전 사당동 자택 앞에서 기자들과 만났을 때도 “모든 원인을 정치인이 제공하고 해결해야 하는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모두 생각이 다르니 국민이 고생한다”고 국내의 정치풍토를 비판했다. 특히 “실제 정치를 움직이는 것은 역시 정치인들이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더 각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사람이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높지 않다”면서 “나도 사무총장을 하면서 분쟁 당사자 간 많은 이유가 있는데 이런 건 모두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많이 강조했다.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등 모든 문제가 정치인들의 싸움으로 생긴다”고 지적했다.
전날 귀가길에 기자들과 만난 반 전 총장은 “완전히 인격말살을 하고 계속 그런식으로 한다면 그건 용납 안 된다”며 “내 양심에 비춰봐도 전혀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 그게 가족이나 친족, 특히 제 개인에 관해선 저는 평생을 제가 남의 모범을 되겠다고 살아온 사람”이라며 근거없는 의혹 제기에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반 전 총장은 불출마 결심과 관련 “지난 31일 밤에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초안을 혼자 잡아서 (불출마소견서를) 썼다. 그걸 가슴에 품고 김숙 전 대사를 불러서 ‘여기 가감할 게 있으면 생각해보라’고 했다”면서 “1일 정의당 심상정 대표를 만나러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소견서 손질을 본 뒤에 가지고 갔다”고 전했다.
한편 반 전 총장은 지역감정 해소와 국민 대통합을 위해 ‘합중국(United States)’ 형태의 국가를 만들고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을 참여하는 연립정부를 세우는 꿈을 실현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 전 총장을 지원했던 정진석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이날 최근 반 전 총장과 독대에서 나눈 대화를 소개하며 “반 전 총장은 ‘철저한 지역 안배’를 원했다. USK(United States of Korea)를 꿈꿨던 사람”이라고 말해 그의 구체적인 정책 등에 대한 뒤늦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