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감독의 ‘아티스트’는 어느 날 눈을 뜨니 세상을 발칵 뒤집은 아티스트로 탄생한 지젤(류현경)과 또 다른 아티스트 재범(박정민)의 놀라운 비밀을 다룬 작품. 극 중 박정민은 지젤의 가능성을 알아본 후 그와 손을 잡고, 그림 값을 높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갤러리 대표 박재범 역할을 맡았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박정민은 한결 샤프한 인상이었다. ‘동주’로 한창 얼굴을 알리기 시작할 당시만 해도 소위 ‘친근한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의 이미지였지만, 이제는 언뜻 ‘잘생김’이 묻어났다.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은 덕인지 궁금하던 차에 박정민은 “무언가에 몰입하면 입맛도 없어질 만큼 다른 걸 아예 못 해요. 작품을 계속 하다 보니 살이 점점 빠져요.”라며 ‘강제 다이어트’ 효과를 밝혔다.
이번 작품 ‘아티스트’의 개봉에 앞서서도 박정민은 늘 그랬듯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지인들은 제 영화를 잘 봤다고 말씀해주시는데, 사실 예의상 칭찬도 있을 거라 생각해서 다 믿지는 않아요. 개봉 전에도, 개봉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제가 나온 영화를 처음 보면 늘 속상해요. 제가 저지르는 실수들이 제 눈에는 보이거든요. 다른 분들은 모르실 수 있는 부분을 보게 돼요. 제가 주요 배역으로 나온 작품은 영화를 두 세 네 번은 봐야 전체적으로 보이더라고요.”
첫 마디에서 단번에 ‘완벽주의’ 성향이 드러났다. ‘완벽주의자’냐 물어보니 ‘강박증’이 있단다. “완벽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거죠. 지금도 계속 완벽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상황이에요. 우선 뭐든 많이 보려고 해요. 국내외를 통틀어서 존경하는 선배님들과 그 분들이 전하는 진심, 진실에 가까워지려고 ‘어떻게 연기 하나’ 유심히 살펴봐요. 시행착오도 겪죠. 그 분들이 접근하시는 방법을 써보다 실패도 해보고. 그러다가 제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거고. 항상 그 과정인 것 같아요. 항상 고민이에요. 저는 항상 진심으로 영화를 대해요. 진심으로 연기하려 하는데, 그 진심이 통하지 않는 것과 통하는 건 무엇인가 고민해요. 통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기도 하지만 계속 고민하고 보고 있어요. 이제는 시행착오를 줄여야 하는 시기가 온 것 같아요.”
지난해 이준익 감독, 강하늘과 함께한 저예산 영화 ‘동주’를 통해 제37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의 영예를 안은 박정민이다. ‘동주’에서 시인을 꿈꿨던 미완의 청춘, 윤동주 시인 역할로 순수한 매력부터 신념에 가득 찬 모습까지 깊이 있는 감정연기를 선보인 강하늘, 동주와 평생을 함께한 벗이자 고종사촌 형으로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송몽규로 분했던 박정민 모두 완벽한 열연으로 재평가 받았다.
차세대 연기파 배우로 충무로에서 극찬을 받고 있는 박정민에게 주어진 청룡영화상의 기쁨은 어느 정도였을까. “수상 후에 사실 자고 일어나서 까먹었어요. 당면한 문제가 있었거든요.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생각하느라 까먹은 거죠. 당장에 해결할 문제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물론 수상한 당일은 마음껏 즐기고 축하도 받고 회사 식구들과 맛있는 것도 먹었는데, 다음날 다시 스트레스 받은 거죠.”
이번 ‘아티스트’에 임하면서 그는 또 한 번 인고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일반인들에게는 그닥 친숙하지 않은 갤러리 관장이라는 인물이 박정민에게도 쉽게 와 닿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미술을 잘 몰랐던 터라 캐릭터 이해 과정에서 오히려 본질적인 접근법을 시도했다.
“직업을 탐구하기 전에 재범이 가진 고민의 중점과 제가 가진 고민을 맞춰 나갔어요. 재범은 극단적인 방법까지 선택하고,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고민의 크기가 다른 거죠. 처음에는 ‘아니, 왜 이렇게까지 하지?’라고 생각했죠.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게 급선무였어요. 영화 준비 기간이 짧기도 했거든요. ‘얘가 진짜로 이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를 보여주는 게 첫 번째 임무였어요. 저와 비교도 많이 해보고 설득력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지젤과 재범은 기본적으로 비슷한 유형의 인간인데,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버린 괴물이 돼버린 거죠. 그런 상황에 저는 대입해본 거예요. 죽고 살고를 떠나서 내가 연기하는 사람인데. 최악의 상황까지 몰렸을 때, 모든 걸 다 잃어버릴 것 같을 때 그 어떠한 짓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사실은 시나리오를 보고 어느 순간 지젤에 몰입했거든요. 지젤은 계속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정도와 양심에 돌아오려 노력하는데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잖아요. 제가 처음에 가진 초심과 신념이 있는데, 배우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타협해야 하는 순간들이 오더라고요. 타협을 본 적도 있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불편하고. 계속해서 돌아오려고 노력하는 지금까지의 삶이 그 친구와 비슷했어요.”
‘아티스트’에서는 평소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던 류현경과 호흡을 맞춰 더욱 눈길을 끈다. 류현경은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자부하며 그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 무명 화가 지젤을 연기했다. 극 중 두 사람의 완벽한 합은 예술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꼬집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블랙코미디를 유발하기까지 한다. 여기에 제임스 역 문종원의 진지함과 코믹을 오가는 연기, 중식 역 이순재의 통찰력 있는 카리스마가 더해져 빛을 발한다.
“현경 누나, 종원 형, 이순재 선생님 등 모든 선배님과 맞춰나갔죠. 현경 누나와 가장 치열하게 고민한 건 주변에서 별로 볼 수 없는 인간들, 별 관심 없는 소재, 뉴스에서만 볼 것 같던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진짜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까 였어요. 그 상황에 몰입해서 가보자는 굉장히 위험한 선택을 했죠. 관객들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려면 우리가 최대한 일상적인 걸 보여주면서 ‘우리도 여러분과 다를 게 없습니다’를 보여줘야겠더라고요.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는데 관객들은 ‘허세 떨고 있네’라며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촬영했어요. 블랙 코미디 요소로는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일부러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이 친구가 할 행동을 최대한으로 감춰야 아이러니가 드러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고민하고 계속 그런 사건의 반복이 있다가 나중에 상황이 터지는 게 아이러니일 거라 생각했죠.”
극 중 재범은 타고난 미적 감각을 자랑해 지젤이 그린 그림의 값어치를 단번에 알아본다. 박정민에게 발달된 감각을 묻자 예상외의 답변이 나왔다.
“제가 굉장히 로직한(논리적인) 인간이거든요. 근데 그게 연기하는 데 방해가 많이 돼요. 처음에 캐릭터에 대한 의심을 많이 해요. 인물에 접근하려면 ‘이게 왜 이렇게 되지?’ 하면서 엄청난 시간이 필요해요. 우리 인생이 그리 논리적이지 않잖아요. 공감 능력이 떨어지니까 내가 한 순간에 저 인물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작품을 준비하면서도 많이 고민해요. ‘로미오와 줄리엣’ 할 때도 그랬고 ‘동주’ 때도 그랬어요. ‘파수꾼’ 때는 정말 심했고요. 시간만 충분하다면 그게 장점으로 잘 감춰질 수 있겠지만, 시간이 부족하면 멘탈이 무너져요. 저는 스스로 ‘연기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늘 말하고 다녀요.”
‘연기는 가슴으로, 감정으로 하는 것’이라는 일반적 지론과 전혀 다른 방식을 찾는 박정민이 학창시절 이과생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사실 수학을 좋아하는 문과생이었다고. 답이 딱 떨어지는 수학을 좋아했고, 국어를 제일 힘들어했단다. 이 때문에 그는 학창시절 수학을 제일 잘하고 국어를 제일 못하는 학생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박정민은 2011년 ‘파수꾼’으로 데뷔했을 때부터 현재까지 만인이 인정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신예인 것을.
“고민하는 과정이 즐거운 스트레스예요. 저는 저를 궁지로 모는 걸 좋아해요. 막 몰아세우는 걸 좋아해요. 그 때 나오는 극적인 걸 좋아하나 봐요. 그 맛에 연기 하는지.(웃음) 저는 늘 이럴 거 같고, 앞으로 계속 이러지 않을까요. 제가 제일 못 하는 게 연기라 생각하는데, 그걸 하고 있는 거죠. 성격이 되게 부정적이에요. 제가 저 자신을 로직하게 바라봐요. 자꾸 잣대를 들이대니까 귀결되는 결과가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하게 돼요. 제 연기, 성공한 배우까지 모든 게 잣대인 거죠. 정말 자존감이 낮은 인간인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게으른 인간이어서 자꾸 깎아내려야 해요. 자다가도 흠칫 놀라야 해요.”
잠든 순간조차 ‘온전한 쉼’을 허락지 않는 엄격한 배우. 대체 박정민의 이완의 시기는 언제일까. “일이 없을 때는 아무것도 안 해요. 놀러 다니거나 집에서 가만히 숨만 쉬고 있죠.” ‘파수꾼’부터 ‘들개’, ‘동주’ 등 저예산으로도 주옥같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건, ‘몰입’에서 비롯된 성장 동력으로 존재한다. 제36회 황금촬영상 신인남우상, 제5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신인연기상, 한국 영화를 빛낸 스타상 신인상, 제37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을 휩쓴 것은 실로 당연한 결과다.
“제 주변에서 저를 바라볼 때 뿌듯해 해요. 그 분들 입장에서는 성장했다고 느끼시나 봐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인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당면해 있어서 계속 저를 때리는 거죠. 그 분들을 보면 저는 좋아요. 저는 앞으로 힘들게 연기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저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영화에 출연 하고 싶고, 인기도 있었으면 하고, 인지도도 높이고 싶죠. 그럼 ‘내가 뭘 해야 하지?’ 나는 정말 연기가 하고 싶어서 이걸 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렇게 생각이 계속 충돌해왔어요. 되돌아봤을 때 돈, 인지도, 인기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 같더라고요. 인지도를 높이고 싶어서 선택한 건 절대 저에게 그런 인기를 선물하지 않았어요. 결국 제가 다시 초심으로 돌아와 보니 그런 것들이 따라오는 거고, 운도 필요한 거라는 걸 느꼈어요.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건 본질인 연기를 가장 잘 하는 것. 그걸 놓치지 말아야죠.”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