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돌아가서도 촛불 정신을 잊지 맙시다.”
지난해 10월29일 국정농단 사태에 격분한 시민 3만여 명은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분노했지만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며 성숙한 시민의식을 지닌 ‘주권자’로서의 품격을 보였다. 지난 11일 20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은 “첫 집회 이후 133일은 주권의식을 다시 일깨워 준 시간”이라며 “이제 광장을 떠나지만 우리가 ‘나라의 주인’ 사실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입을 모았다.
박근혜정권 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1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과 함께한 모든 날이 좋았다’를 주제로 마지막 주말집회를 열었다. 박 전 대통령 파면선고 다음 날 열린 집회는 그 어느 때보다 축제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본 집회 후 축포가 터지고 촛불 파도타기가 진행되자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길호(59)씨는 “대의민주주의 한계를 국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며 “이 순간만큼은 즐기고 싶다”고 말했다.
3만명(주최 측 추산)으로 시작된 촛불집회는 각종 의혹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232만명까지 눈덩이처럼 불었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이 연설문 작성 등에서 최씨의 개입을 인정하면서도 본인은 국정농단과 무관하다는 내용의 대국민담화를 3차례에 걸쳐 발표하자 민심은 더욱 들끓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친박계 의원의 발언은 오히려 촛불에 기름을 끼얹는 듯 시민들을 자극했다.
지난해 12월9일 국회가 탄핵안을 가결한 이후 촛불집회는 “헌재의 탄핵 인용”을 촉구하며 들불처럼 번졌다. 매주 촛불집회에 참여했다는 박상천(44)씨는 “(박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의 실체가 명백히 드러나는 데도 국민들을 기만했다”며 “탄핵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흐름으로 당연한 결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된 촛불집회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방증하는 숱한 기록도 세웠다. 지난해 10월 29일부터 133일 동안 매주 주말 진행되면서 누적인원 으로 1,600만명을 기록했다. 지난해 12월3일 열린 6차 촛불집회에는 232만명이 모여 단일 집회로는 역대 최다 인원을 나타났다.
그동안 대규모 집회마다 폭력양상이 우려됐지만 촛불집회는 연행자 0명과 무사고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에 법원은 6차 촛불집회를 하루 앞두고 최초로 청와대 앞 100m까지 행진을 허용했다. 이례적으로 서울지방경찰청은 1차 촛불집회 다음날 “시민들이 경찰 안내에 따르고 이성적으로 협조해 줘서 감사드린다”고 밝히기도 했다.
맞불집회에 나선 친박 단체들은 지난해 11월19일부터 ‘태극기집회’를 열며 박 전 대통령 탄핵 반대운동을 벌였다. 지난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 당시 경찰과 충돌 등으로 집회 참가자 3명이 사망하긴 했지만 5개월 동안 큰 물리적 충돌 없이 집회를 이어갔다. 이들은 앞으로 탄핵 불복종운동을 펼칠 방침이지만 “폭력행위는 자제하자”며 내부 단속에 나섰다. 태극기집회 참석자들도 최악의 국론분열과 폭력 집회를 막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촛불집회에는 숨은 주역의 활약도 빛났다. 일부 의사와 의대생들은 자체적으로 봉사단을 꾸려 광화문광장에 의료서비스 부스를 설치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자원 활동가들은 길 안내 등을 하며 질서 유지에 힘을 보탰다. 집회 후에도 시민들은 끝까지 남아 쓰레기를 치우며 뒷정리를 담당하기도 했다. 외신들은 이런 모습에 “평화 시위의 표본”이라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김서현(35)씨는 “촛불집회는 시민으로 시작해 시민으로 끝났다”며 “이번 경험은 새로운 한국 사회로 나가는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