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한국시간) 영국 런던의 화이트하트레인에서 끝난 토트넘과 밀월의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 8강. 경기장에는 오렌지색 모자를 쓴 수백 명의 보안요원이 추가 투입됐다. 홈팬과 원정 팬들이 만나는 지점의 관중석은 10칸 이상을 비워놓았는데 그것도 모자라 보안요원들이 양측에 일렬로 서서 휴전선 철책 역할을 했다. 그 위로 삿대질과 고성이 오갔다.
훌리건(과격 축구 팬)으로 가장 악명높다는 밀월의 이날 타깃은 손흥민이었다. 특별히 손흥민이 미워서는 아니다. 상대 팀에 아시아인이 있으면 덮어놓고 조롱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들이다. 더욱이 상대는 런던연고 라이벌. 손흥민이 볼을 잡을 때마다 그들은 야유와 함께 “DVD”를 외쳤다. ‘불법복제 DVD 판매자는 십중팔구 아시아인’이라는 편견에서 나온 구호다. 원숭이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개고기 문화’에 대한 비난이 섞인 노래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손흥민은 그러나 가장 부담스러울 상황인 동시에 팀이 가장 필요로 할 때 3골 1도움으로 지난 2015년 영국 진출 이후 최고 활약을 펼쳤다. 1대0이던 전반 41분 왼발 중거리슈팅으로 약 한 달 반 만에 골 맛을 봤고 후반 9분에는 자신의 골 목록 중 가장 멋진 득점 중 하나로 기록될 장면을 남겼다. 미드필드에서 길게 연결된 볼을 등진 상태에서 발리슈팅으로 마무리했다. 이어 종료 직전 슈팅이 골키퍼 다리 사이로 들어가 시즌 14호 골로 연결되면서 한국인 프리미어리거 최초로 해트트릭을 작성한 손흥민은 영국 통계전문 후스코어드닷컴으로부터 평점 10점 만점을 받았다. BBC 선정 경기 최우수선수(MVP)도 물론 손흥민이었다. 3부리그 팀이기는 하지만 최근 17경기 연속 무패를 달리던 밀월을 토트넘은 6대0으로 드러눕혔다. 영국 언론들은 “손흥민이 빛나는 골로 해트트릭을 작성했다. 최선의 방법으로 밀월의 무례한 팬들을 침묵시킨 셈”이라고 보도했다.
손흥민은 경기 이후 “(행운도 따라준) 나의 날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토트넘은 손흥민의 날이 이날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득점 공동 선두(19골)인 토트넘 해결사 해리 케인이 이날 전반 초반 오른쪽 발목을 꽤 크게 다쳤기 때문이다. 시즌 초반인 지난해 9월 다친 그 발목이다. 케인이 두 달 가까이 이탈한 사이 손흥민은 8경기 3골 1도움으로 토트넘 공격을 이끌었다. 프리미어리그 선정 9월의 선수로도 뽑혔는데 아시아인이 이달의 선수에 오르기는 손흥민이 처음이었다.
당시의 기억이 생생한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은 “케인을 잃었지만 손흥민이 있어 위안이 된다. (윙어가 전공인) 그는 스트라이커도 가능하다”며 “우리 팀의 가장 멋진 경기 중 하나였던 맨체스터 시티전에서 이미 능력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2대0으로 승리한 지난해 10월 맨시티전에서 손흥민은 쐐기골을 어시스트했다. 프리미어리그 선두 첼시에 승점 10점 뒤진 2위 토트넘은 오는 19일 사우샘프턴과의 홈경기를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