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150억원 짜리 '쪽성경'






한 권에 150억원. 지난 2013년 11월 뉴욕 소더비 경매장의 낙찰 기록이다. 경매품은 ‘베이 시편(Bay Psalm Book)’. 구약성서의 시편만 영어로 번역해 출간한 책이다. 문고판보다 약간 큰 사이즈에 분량이라야 달랑 148쪽에 불과한 이 책은 경매에 나온 지 단 5분 만에 팔렸다. 낙찰가 1,416만5,000달러. 우리 돈 150억3,898만원이라는 낙찰가는 인쇄된 책으로는 사상 최고 가격이었다. 무엇이 작고 낡은 ‘쪽성경’의 가격을 이렇게 끌어올렸을까. 희소성과 역사적 가치 때문이다.

1640년 3월15일 출간된 ‘베이 시편’은 모두 1,700여권. 아직 11권이 남아 있지만 소장자가 도서관이나 거대 부호여서 경매에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 가격을 끌어올렸다. 소장자 가운데 유일하게 두 권을 갖고 있던 뉴



욕남부교회가 내놓은 이 책을 경매 5분 만에 사들인 사람 역시 부호였다. 세계적 사모펀드(PEF) 중 하나인 칼라일그룹 회장인 데이비드 루벤스타인 회장. TV 대담 프로그램의 사회자, 자선가로도 유명한 그는 낙찰받은 직후에 “베이 시편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 샀다”고 말했다.


어떤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을까. 우선 영국의 북미 식민지에서 발간된 최초의 서적이다. 인구 2만명 남짓하던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각고의 노력 끝에 펴냈다. 인쇄물로는 사상 최고가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서적만 기준으로 삼으면 베이 시편보다 비싼 책들이 3권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직접 작성한 노트와 스케치, 설계도를 모은 ‘작업노트(Codex Leicester·3,080만 달러)’를 비롯해 1297년 인쇄된 ‘대헌장(Magna Carta·2,130만 달러), 7세기에 편찬된 스토니허스트복음서(St Cuthbert Gospe·1,430만 달러). 하지만 이 책들은 손으로 쓴 필사본이고 베이 시편은 인쇄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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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 시편이 인쇄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영국 식민지 매사추세츠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인쇄물을 얻기 위해 애쓰는 가운데 청교도 성직자 호세 글로버가 호응했다. 호세는 신대륙에서 성서를 출판하겠다는 꿈을 안고 인쇄기기를 사들여 기술자들을 대동하고 1638년 대서양 횡단에 나섰다. 본인은 매사추세츠 도착 직후 폐렴으로 사망했으나 호세의 미망인인 엘리자베스 글로버가 뉴칼리지(하버드대학의 전신)와 제휴해 인쇄소를 차렸다. 호세가 대동했던 인쇄기술자 중의 한 사람인 스테븐 데이는 시행착오 끝에 각종 종교 인쇄물을 찍어내는 데 성공했다.



매사추세츠는 성직자 30명을 동원해 시편을 영어로 번역, 데이의 인쇄기로 1640년 봄 마침내 ‘베이 시편’을 펴냈다. 최초 인쇄판은 원고 누락과 편집 실수에도 호평받았다. 엘리자베스 글로버가 뉴칼리지의 학장과 재혼하는 와중에도 오로지 인쇄기에만 매달려 식민지 최초의 인쇄물 발간에 성공한 스테븐 데이는 공로를 인정받아 300 에이커라는 넓은 땅을 받았다. 스테븐 데이가 시작한 하버드대학 출판부는 인디언 언어로 번역된 성서까지 찍어내는 등 북미 식민지의 초기 출판업 발전을 이끌었다.

베이 시편은 현대적 관점에서 무수한 얘깃거리도 갖고 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크라우드 펀딩에 해당된다. 호세 글로버는 인쇄기와 주변기기를 사는 데 친구 7명과 함께 자본을 모았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후원자들에게서 모은 돈이 80파운드. 20 파운드는 인쇄기를 사고, 60파운드는 잉크와 종이를 샀다. 컴퓨터회사보다 잉크회사와 종이회사가 돈을 더 많이 버는 구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베이 시편은 인쇄를 거듭하면서 수정되고 다듬어져 본국인 영국에서도 인쇄됐다. 식민지의 문화가 영국에 역수입된 최초 사례로도 꼽힌다.

쪽성격 편찬으로 시작된 미국의 책 시장은 오늘날 292억 달러에 이르는 거대시장으로 커졌다. 세계 책 시장 규모는 1,022억 달러에 이른다. 중요한 것은 돈으로 평가되는 출판과 책 시장의 규모가 곧 국력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개개인들의 독서가 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국제연합(UN)에 따르면 지난 2015년 한국인의 독서량은 192개국 중 166위다. 성인 10명 중 9명은 독서량이 하루 10분도 안 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독서국민의 경험’ 없이 제대로 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가 없다. 영국과 미국, 독일, 일본이 그런 경로를 밟았다.

베이 시편은 미국의 출판 대국화와 미국인의 독서 국민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주목할만한 대목은 ‘베이 시편’이 영국의 북미식민지 최초 인쇄물이지 북미 최초 인쇄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주대륙 최초 인쇄물의 주인공은 스페인의 후안 파블로. 1539년부터 멕시코에서 35권을 출간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가 살았다는 집만 내려올 뿐 서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멕시코지방이 매사추세츠보다 101년 전에 출판한 기록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출판 문화를 꽃피우지 못한 이유는 대중의 관심과 기록 보전을 소홀히 했기 때문은 아닐까. 정작 걱정되는 것은 우리다. 국민은 책을 안 읽고 역대 대통령마다 기록물 훼손과 임의 파기 시비에 휩싸이고 있으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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