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첫 정상회담에서 부적절한 ‘악수 외교’로 미독 양국의 썰렁한 관계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앞서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과도한 악수로 구설에 올랐던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는 악수를 청한 메르켈 총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아 양국관계가 소원해졌음을 강하게 시사했다. 그는 이어진 정상회담에서도 독일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과 대미 무역적자 축소를 겨냥한 ‘공정무역’을 거듭 압박했다. 독일 유력지 슈피겔은 “이번 정상회담은 전반적으로 냉랭했다”고 평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 간의 냉랭한 기류가 드러난 것은 17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집무실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두 정상이 나란히 앉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메르켈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을 쳐다보는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반대쪽과 앞쪽만 응시한 채 눈길을 피하자 사진기자들은 두세 차례 큰 소리로 악수하는 모습을 요청했다. 이에 메르켈 총리가 “악수를 원하시냐”고 물으며 트럼프 대통령을 쳐다봤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얼굴을 찌푸린 채 다른 쪽만 쳐다보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공개석상에서 트럼프가 보인 부적절한 응대에 총리만 12년을 지낸 ‘베테랑 정치인’ 메르켈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트럼프 대통령이 외국 정상과 악수하는 기이한 방식에 외교정책이 담겨 있다”며 유럽연합(EU) 해체와 보호무역을 지지하는 트럼프가 자신과 대척점에 선 메르켈 총리와 형식적인 악수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갈등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꼬집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Brexit)’ 전령사인 메이 총리나 자신의 정책을 옹호하는 데 앞장선 아베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악수로 친밀감을 강조해 상대방을 당혹하게 한 바 있다. 그는 지난달 10일 백악관에서 아베 총리와 만나 19초 동안 손을 꽉 잡고 다른 손으로는 아베의 상사인 듯 손등을 여러 차례 두드린 뒤 ‘강력한 악수(strong hands)’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메이 총리와는 정상회담 후에도 갑자기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의 손등을 토닥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미독 정상 간 냉랭한 분위기는 정상회담과 뒤이은 기자회견에서도 이어졌다. 회담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TO·나토) 동맹국의 방위비 부담을 늘려야 한다는 미국 측 요구에 독일은 국내총생산(GDP)의 2%까지 방위비 지출을 늘려나가겠다고 응답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가 주장한 미국과 EU 간 FTA 협상 재개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메르켈 총리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한·EU FTA 등은 양측에 이익을 주고 더 많은 일자리를 가져다줬다”고 예를 들며 미국과의 FTA 협상을 부각시키려 애썼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수년간 많은 나라에 매우 불공정하게 대접받았다. 무역정책은 공정해져야 한다”고 주장해 미국 우선의 일방적 무역정책을 거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메르켈 총리를 향한 기자 질문을 가로채며 “나는 고립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근거 없이 제기한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의 도청 논란이 거론되자 “도청에 관해 나와 메르켈 총리는 공통점이 있을 것”이라고 밝혀 메르켈의 쓰라린 기억을 들추고 미국의 국익에도 상처를 입힌 것으로 평가된다. 앞서 에드워드 스노든 전 미 중앙정보국(CIA) 직원은 2013년 미 국가안보국(NSA)이 메르켈 총리의 전화를 감청했다고 폭로해 미독 관계가 크게 흔들렸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평소 돈독한 메르켈 총리에게 전화해 이해를 구하면서 간신히 수습한 바 있다.
/뉴욕=손철 특파원 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