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의 봄도 노란 산수유꽃과 함께 왔다. 새벽에 떠나 온 중부지방은 회색이 지배하는 초봄이었는데 3시간을 이동해 온 구례에는 이미 노란 봄이 피었다. 재작년 겨울, 빨간 산수유 열매 위에 내린 잔설을 보겠노라고 찾았다가 헛걸음만 하고 돌아왔던 구례의 마을들은 느른한 춘곤증에 취해 있었다. 춘곤증을 털어버리고 해뜨기 전 서둘러 찾아 오른 구례군 산동면 상위마을에는 아침 햇살과 노란 산수유꽃 사이로 물기를 머금은 새벽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봄의 구례는 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매화가 피고 매화가 절정에 이르면 산수유가 피어나고, 또 산수유가 절정에 이르면 화엄사 뜰 안의 홍매화가 피어난다. 다시 홍매화가 절정에 이르면 하얀 벚꽃이 산하를 덮기 시작한다. 꽃들이 계절 흐름에 몸을 맡기면서 흘러가는 셈이다. 구례로 귀촌한 지 7년째라는 임세웅 문화관광해설사는 “산수유축제에 오기 전에 대중교통 시간을 잘 맞추면 화엄사에 가서 홍매화를 보고 점심식사를 한 후 산수유축제에 들러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임씨는 매화와 산수유·홍매화와 벚꽃을 단번에 둘러보는 구례 여행을 ‘3화(花)3색(色) 봄꽃여행’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중에서도 화엄사 경내의 300여년 된 홍매화 나무에 피는 꽃은 특이하다. 다른 홍매화가 겹꽃인 것과는 달리 홑꽃으로 꽃잎이 5장이다. 이 나무는 각황전의 완공을 기념해 지난 1702년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색깔이 검붉어서 흑매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2만7,000명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구례군은 해마다 이맘때면 어수선해진다. 산수유축제 때문이다. 축제행사장이 차려졌고 지리산온천랜드 옆 광장에는 먹거리와 기념품을 판매하는 천막들이 끝없이 들어섰다. 산수유축제가 시작된다기에 그 시원(始原)을 찾아보기로 했다. 구례군 산동면 개척마을에는 산둥성 출신 처녀가 중국에서 산수유나무를 가져와 처음 심었다는 시목지(始木地)가 있다. 시목의 나이는 1,200살. 하지만 아직도 노란꽃을 피우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시목지 바로 밑에는 임진왜란때 원균의 칠전량 패배 후 3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이순신이 조선수군의 재건을 위해 출정한 곳이 구례임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있다.
구례에는 신라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있다. 동화에 나오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우리나라 설화인데 바로 이곳 구례의 대나무밭에서 시작됐다. 신라의 경문왕과 관련된 이야기로 왕의 모자를 만든 이가 임금의 큰 귀를 보고 입이 근질거려 대숲 안에 들어가서 발설을 했다. 그 뒤로 바람이 불 때마다 대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는 소리가 들려 왕이 노여움에 대나무를 베어내고 심은 나무가 바로 산수유다. 산수유축제는 풍년을 비는 제사로 시작되는데 바로 이 나무 앞에서 거행된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구례 산수유는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산수유는 중요한 한약재로 구례가 가지고 있는 짭짤한 소득원 중 하나다. 지금은 열매 속의 씨를 기계로 빼내지만 예전에는 부녀자들이 일일이 이로 물어뜯어 빼냈다. 그래서 구례 처녀들은 이가 깨지고 입이 부르트는 일이 다반사였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구례 처녀들은 건강해졌다. 씨를 빼면서 삼킨 산수유즙에 몸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평화스러운 구례지만 여순반란 때는 격전지였다. 토벌군이었던 백인기 연대장이 빨치산에 쫓기다 이 곳에서 자살을 했는데 국방군은 ‘산동면민이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가혹한 탄압을 시작했다. 국방군은 빨치산 부역자를 색출했고 백부전이라는 처녀는 오빠를 대신해 끌려가 처형당했다. 이 처녀가 죽기 직전 부른 노래는 ‘산동애가’로 남아 오늘에 전한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어보지 못하고 … ’
동족상잔의 아픔을 품고 있는 지리산은 1967년 대한민국의 첫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올해는 지정 50주년이 되는 해로 구례 산수유축제는 이를 기념해 오는 26일까지 예년보다 다채로운 내용으로 산동면 온천관광지 일원에서 진행된다. /글·사진(구례)=우현석객원기자